김초엽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김초엽 작가의 작품은 예전에 밀리의 서재에 올라왔던 《캐빈 방정식》을 읽은 적이 있고,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아직 완독하지 못했는데, 얼떨결에 집어든 이 책을 먼저 완독해버리게 되었다. 첫 장편소설이라고 해서 혹시 안맞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는데, 그건 기우였던 걸로. 끝까지 재미있게 잘 읽었다. 긴 호흡의 소설도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고, 심지어 그리 길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김초엽 작가의 작품은 특유의 스타일이 있는 것 같다. 일단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디테일함을 늘 느끼는 것 같다. 나야 이과쪽이나 SF쪽은 거의 문외한인지라, 팩트체크나 자세한 실정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서술이나 스토리가 촘촘함은 충분히 느낀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느끼게 한 작가의 필력이 정말 좋은것일테고. 또 한가지는, 연구직들의 일상을 너무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소설 등에서 교수나 연구원 들이 등장하고 학회나 논문, 자료의 체크 등의 소재는 빈번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아무래도 소설 혹은 허구의 세계라는 전제가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는데, 김초엽 작가의 작품을 읽을때마다 느끼는거지만 너무 자연스러워서 위화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마치 내 실생활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을것만 같은 상황이랄까?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뭔가 엄청 스펙터클하고 반전이 엄청난 것도 아니었다. 읽다보면 반전이랄 것도 없이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한 정도의 텐션이다. 그리고 디스토피아적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기빨리는 느낌도 없다. 왠지 묘하게 평온한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현재의 서술자를 중심으로 과거의 스토리를 하나씩 드러내주는 구성은 자연스럽게 소설에 집중하게 만들어준다. 사실 특이한 구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혀 식상하지 않고, 분명 텐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피곤하지 않았다. 뭔가 온기가 있다고나 할까?
그나저나 SF작가들에게 늘 느끼는 거지만 이런 설정은 어떻게 생각해내는 걸까...? 더스트라니.. 거기에 온실이라니.. 이런 네츄럴한 느낌의 디스토피아 + SF소설이라니. 그리고 그 속에 녹아있는 인간군상들의 모습들도 있고.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를 읽으면서부터 느낀거지만, 내가 SF를 안 좋아하는게 아니라 사실은 좋아하는게 아닌가 싶은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아니면 한국작가들의 SF가 취향이거나...ㅎㅎ
이 작품은 작가의 소속사 계열인 자이언트북스와 밀리합작으로, 밀리의서재에서 독점으로 먼저 공개중인 것 같은데, 감사하게도 구독중인지라 좋은 작품을 놓치지 않고 읽었던 것 같다. 그럼 이제 작가의 대표작품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도 얼른 마무리해봐야겠다.
원래 그렇게 중요하거나 주목받는 식물은 아니었다. 특별한 자원 가치가 있거나, 희소하거나, 관상용이거나, 약리적 효과가 있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분류학 프로그램의 생물자원 탭에는 이렇게만 적혀있었다. '유전적 다양성에 기여할 가능성이 있음'. 말이 좋지, 생태계의 유전적 다양성에 기여하는 건 모기도 매한가지였다.
여기 사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공헌자'들이야. 재건에 기여한 사람들이라는 거지. 이 단지는 공헌자들에게 우선 입주권을 줬거든. 사람은 나쁜 것과 착한 것 어느 한쪽으로만 가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굳이 말하자면 좀 흠결이 있더라도 지금 이 세계를 회복하는 데에 도움을 준 사람들이지. 그런데 네 친구들 말이 아주 틀렸다 하기도 어려운 게, 더스트 시대에는 이타적인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가 없었어. 물론 그 이타적이지 않은 사람들의 후손인 우리가 할 말은 아니지만.
사실이었다. 대단한 사명감이 없는 것도, 이름을 잘 외우는 것도. 그냥 하다보니 잘하게 된 일이었고, 그래서 뒤늦게 애정을 갖게 된 것도 맞았다. 굳이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때 나오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아주 좋은 사람이 타인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지수가, 나오미와 레이첼에게 그런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나오미는 온실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도, 상황이 이렇게 되자 불평하는 사람들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희망이라는 것의 본질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상승할 때는 의미가 있지만, 다 같이 처박히고 있을 때는, 그저 마음의 낭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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