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 책을 다 읽었다. 너무너무 좋은 작품집이고 너무너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인데 왜 이렇게 오래걸렸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잠깐 읽다가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말이 더 맞겠다. 그 동안 밀리의 서재 한정으로 올라왔던 《캐빈 방정식》과 첫 장편소설인 《지구 끝의 온실》을 먼저 다 읽어버렸다. 어떻게보면 김초엽 작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집을 건너뛰고 다른 작품들 부터 읽었던 셈이다. 《캐빈 방정식》을 읽으며 그 디테일함에 매력을 느꼈고, 《지구 끝의 온실》을 읽으며 긴 호흡의 소설도 이렇게 잘 끌고갈 수 있구나 하고 인상깊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 책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을 결국 다 읽고 보니, 역시 그녀의 베스트 작품집은 이 책이었구나 싶다. 전체 7편의 단편이 실려있는데 정말 한편도 버릴 작품이 없더라.
사실 한국 SF 소설에 대한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작품집은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였다. 이 작품집을 읽으면서 SF소설이라는 것이 오히려 더 현대 사회를 반영하고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김초엽 작가의 이 소설집은 정말 그 결정체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SF 장르에 대해 갖게 되는 선입견인 차갑고 기계적일 것 같은 이미지와는 반대로,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따뜻하고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 자신에 대한 모습, 그리고 지구로 대표되는 우리가 사는 사회, 우리의 편견들, 그리고 유토피아로도 극복할 수 없었던 우리의 시선들... 특히, 소수자에 대한 시선들은 바로 전에 읽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와 연결되면서 꽤 많은 부분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어쩌다보니 이 책을 이제서야 다 읽었던 것이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더 좋은 시너지를 주었던 셈이다.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임과 동시에 김초엽 작가의 소설답게 디테일한 설정과 설명이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소설 《마션》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워낙에 여과없는 주인공의 입담이 매력포인트이긴 했지만, 누가뭐래도 《마션》의 장점은 디테일한 설명과 고증이라 할 수 있겠다. 김초엽 작가가 과학도 출신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각 설정을 꽤 디테일하게 혹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주는 매력이 있다. 사실 단편소설을 통해서 이러기가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지않아서 너무 좋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에세이 작가 중에서 김혼비 작가의 작품이라면 일단 꼭 읽고본다..라는 원칙이 있는데, 이제 SF장르에서는 김초엽 작가의 작품은 일단 읽고 보는 것으로 해야할 것 같다.
그때 나는 알았어. 우리는 그곳에서 괴로울 거야. 하지만 그보다 많이 행복할 거야. _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마음이 느슨해졌다. 루이가 바로 며칠 전까지 함께 지내던 바로 그 루이처럼 느껴졌다. 루이는 희진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희진의 뒤로 펼쳐진 노을을 보고 있었다.
“그럼 루이, 네게는.”
희진은 루이의 눈에 비친 노을의 붉은 빛을 보았다.
“저 풍경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보이겠네.”
희진은 결코 루이가 보는 방식으로 그 풍경을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희진은 루이가 보는 세계를 약간이나마 상상할 수 있었고, 기쁨을 느꼈다. _ 〈스펙트럼〉
“선배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물성이라는 건 생각보다 쉽게 사람을 사로잡아요. _ 〈감정의 물성〉
의미는 맥락 속에서 부여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_ 〈감정의 물성〉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흔히 애증이 얽힌 사이로 표현된다. 딸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는 엄마와 그런 엄마의 삶을 재현하기를 거부하는 딸. 착한 아이 콤플렉스를 앓는 딸과 딸에 대한 애정을 그릇된 방향으로 표현하는 엄마. 여성으로 사는 삶을 공유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다른 세대를 살아야 하는 모녀 사이에는 다른 관계에는 없는 묘한 감정이 있다. 대개는 그렇다. 한때는, 지민도 엄마와 자신 사이에 그런 애착과 복잡한 감정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_ 〈관내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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