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일단 제목부터 내가 끌릴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아무튼 시리즈 자체를 내가 너무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문구덕후로서 기본적으로 '노트' 혹은 '메모'와 같은 표현이 나오면 일단 눈이 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무턱대고 집어든 이 책은, 역시나 아무튼 시리즈 답게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여느때처럼 예상 밖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결론적으로 좋았다.
처음 읽기 시작하면서 가장 의외였던 부분은 저자가 메모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 메모에 대한 그의 생각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메모주의자가 메모주의자가 되고, 천성적으로 메모주의자가 아니었던 이유로 메모에 대해서 더 깊이 고찰할 수 있었다는 점이 많은 공감을 가져왔던 것 같다. 솔직히, '메모'라는 소재로 이만큼의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놀라웠던 것 같다. 사실 저자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상태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쯤에서부터 저자의 이력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2부로 넘어가면서부터 더 강해진 것 같다.
2부에서는 저자의 메모를 소개해 주는데, 솔직히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에 메모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그가 소개한 메모들은 내용이 굉장히 길었고 또 깊었다. 메모는 메모인데 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리고 실제로 내가 하고있는 메모와는 정말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만으로도 조금 다듬으면 바로 하나의 칼럼 정도는 쓸 수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책을 다 읽고 저자소개를 읽어보니 저널리스트를 꿈꾸던 라디오PD였다. 그럼 그렇지.. 글이 남다르다 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지막에 소개한 태평양전쟁에 관련된 이야기, 그리고 이영채교수님과의 만남을 통한 조선인전범에 대한 취재 이야기였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전에 읽었던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의 내용이 많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렇게 한사람의 정리된 메모를 통해서 엿보니 다시금 내 머리속에서도 잘 정리가 되는 느낌이었다. 물론 저자처럼 모두의 메모가 이러한 형태는 아니겠지만, 메모를 통해서 생각이 정리되고 또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나 역시 '메모'를 하는 행위를 즐기기는 하지만 '메모' 자체에 대한 고찰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해서 이번기회에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나의 비애는 아무것도 안 하고 나를 아주 괜찮은 사람으로 남들이 알아봐주길 원했다는 것이다. 나의 비애는 스스로 인정하고 존중할 만한 그 어떤 일을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것이었다. 이 초라함이 비애의 정체였다. 나는 이것을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채 눈물로 인정했다.
사실, 나는 자주 과대평가되었다. 실제의 나보다 더 잘나 보이고 장차 더 잘해낼 것으로 보였다. 나는 ‘아무튼, 기대주’였다.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은 빈 깡통이고 말은 앵무새처럼 남의 말이나 따라 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물론 나도 그런 시선을 우월감 속에 은근히 즐겼다. 그런 태도를 가리키는 단어가 있다. 허영심이다(그렇지만 언젠가 들통이 나서 망신당하지 않을까 내심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못하겠어요! 난 그런 사람 아니에요.” 솔직하게 인정하면 그만이겠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기대받는 것만큼 ‘진짜로’ 잘해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또한 내게는 있었다.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잘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 마음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 마음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바뀌려면 죽기 살기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가장 좋은 것, 믿음직한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다.
・ 나의 내일은 오늘 내가 무엇을 읽고 기억하려고 했느냐에 달려 있다.
・ 내가 밤에 한 메모,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 나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은 나의 메모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후짐’ 때문에 수시로 낙담한다. 그래서 더욱더 나 자신이 더 나아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고 세상이 더 좋은 모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다. 마음은 어둡지만 미래에 대한 계획은 있다. 네루다의 시처럼 우리에게는 “아직 노래하지 않은 작은 단어들”이 있다.
한때는 사회가 나를 제 맘대로 소유할 뻔했던 적도 있었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사회가 그 일을 하고 만다. 스스로 생각하지 않으면 내 생각의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만다. 결국은 대다수의 시선에 의존적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사회가 힘이 셀수록 그저 흘러가는 대로, 되는 대로 가만히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살 필요가 있다. 메모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는 시간을 자신에게 선물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메모는 ‘자신감’ 혹은 ‘자기존중’과도 관련이 있다. 스스로 멈추기 때문이다. 스스로 뭔가를 붙잡아서 곁에 두기 때문이다.
메모도 책 읽기나 글쓰기처럼 자발적으로 선택한 진지한 즐거움, 놀이의 영토에 속한다. 이 세상에서 어떻게 영향을 받을까를 스스로 결정하는데 왜 즐겁지 않겠는가?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문제 많은 현실에서 살려면 반드시 탈출구가 필요하다. 탈출구를 만드는 것 자체가 꿈이 된다.
한 해가 끝나고 또 한 해가 시작되면 다이어리를 구입한다. 혹은 어디선가 얻기도 하고 선물로 주고받기도 한다. 한 해가 흐르는 동안 나는 시간의 흐름을 단어로, 문장으로 바꿔놓는다. 메모를 한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의 메모장 안에서 인내심과 경이로운 순간들, 생각들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메모는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방식, 자신만의 질서를 잡아가는 방식이다. 메모는 미래를 미리 살아가는 방식, 자신만의 천국을 알아가는 방식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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