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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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듀나, 김보영, 배명훈, 장강명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

| Mashimaro | 2020. 8. 17. 20:24







나는 지금까지 SF소설들을 그리 많이 읽지 않았고, 당연히 그렇게 큰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아마도 좋아하는 장르였다면 열심히 읽었겠지. 하지만 아주 안읽은 것은 아니다. SF라는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호불호를 많이 타는 것 같다.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SF라는 장르는 나에게 있어서 늘 외국작품이라는 이미지가 박혀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언젠가 서점사이트에서 자꾸 눈에 띄어서 장바구니에 들어갔던 것 같은데, 정말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이 책을 읽어봐야겠다 하고 펼쳐서 읽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나에게 있어서 한국 SF소설에 대한 선입견을 깨준 작품이 되었다. 아니, 선입견 자체가 나에게 있긴 했나? 아예 거의 접해보질 못했기 때문에, 일단 등장인물의 이름이 한국사람의 이름이라는 자체부터 매우 생소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SF소설이라는 설정 자체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아무래도 장강명 작가의 소설이 가장 앞에 배치된 것은 나에게 적응의 시간을 주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나 싶다.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조금 놀랐다. 4명의 작가의 4개의 작품이 실렸는데, 다 좋았던 것 같다. 신선함도 있었고 놀라움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멋진 SF작가들이 있었다니. 장강명 작가야 뭐 워낙 유명하니까 알고는 있었지만, 그가 SF장르도 쓴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이 작품집 속에서 내가 SF작가로 알고있는 분은 김보영 작가 뿐이었는데, 그런 선입견(?)이 작용한 것인지는 몰라도 사실 김보영 작가의 작품이 제일 좋았던 것도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 시작은 가장 지루했고,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거지? 하는 생각에 꾸역꾸역 읽었던 것 같은데, 후반으로 가다보니 이것이야말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랄까? 굉장히 많은 생각과 이슈들을 짧은 단편속에 정말 잘 녹여냈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어쨌든, 이 책은 나에게 있어서 매우 큰 수확이었다. 한국형(?) SF 장르의 발견이라고나 할까? 외국작품들과는 다른 뭔가 진한 정서가 있는 느낌이다. 앞으로는 꽤 찾아보면서 읽게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든다. 네 분의 작가님들 정말 사랑합니다. 





그런 감정들은 모두 진짜였다. '진짜 감정'의 힘은 강력하다. 가짜 몸뚱이와 가짜 대사와 가짜 설정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거짓들이 위태롭게 걸린 상태에서도 전체 그림이 어색해 보이지 않게 우뚝 서서 지지대가 되어준다. 사람들은 그 감정의 격류에 휘말리고 싶어서 극장에 가고 TV를 켜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지금까지 줄곧 그랬다. _ 장강명 〈당신은 뜨거운 별에〉


쇼 제작진은 쉽게 속아 넘어갔다 그럴싸한 이야기로 남을 현혹하는 기술을 오래 연마한 이야기꾼을 현혹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들에게 그럴싸한 이야기의 재료와 그 이야기로 메울 수 있는 빈틈을 함께 내주는 것이다. 픽션에 가장 깊게 사로잡히는 사람은 바로 그걸 쓴 작가다. _ 장강명 〈당신은 뜨거운 별에〉


그러나 아무리 상대에게 우호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유진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과 자아정체감을 잃게 될 가능성이었다. 다른 사람이 답안을 알려준 정답과 자신이 선택한 오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후자다. 사람은 오답을 선택하면서 그 자신이라는 한 인간을 쌓아가는 것이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약'을 먹고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되더라도, 누군가 그 약을 마실 물에 몰래 타 넣어 먹게 되는 것과 스스로 복용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_ 장강명 〈당신은 뜨거운 별에〉


주변으로부터 아무런 도움조차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빠져 오래도록 고군분투하는 상황을 가정해보라. 특히 그 도움이 자신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타인에게는 아주 사소한 종류인 경우를 그려보라. 결국엔 누구나 스스로를 처절하게 버림받은 존재로 느끼게 되고야 만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인물과 자신과의 거리를 계산하게 된다. _ 장강명 〈당신은 뜨거운 별에〉


은경은 결재자 컴퓨터가 꽤 인간적이라고 생각했다. 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다정함이었다. 그저 대화 몇 마디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그렇게 달라질 줄은 미처 몰랐다. 친밀한 대화의 비결은 그런 무의미한 말들을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나누는 일인지도 모른다. _ 배명훈 〈외합절 휴가〉


세상의 중심에서 온 사람들. 굳이 의식하고 살지 않아도 사는데 별 지장이 없는 것 같다가도, 가끔씩은 어딘가에서 내려온 누군가의 결정이 웬만하면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규칙이 되어 평범한 시골 사람들의 삶 하나하나에까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가져오곤 했다. _ 배명훈 〈외합절 휴가〉


"인간은 아직 '자아'가 뭔지 몰라. 인류가 알아내지 못한 지식은 내게도 없어."

이진서가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의식은 단 하나 자신의 의식뿐이야. 타인의 의식은 단지 추측할 수 있을 뿐이야. 실상 인간이 타인에게 자아가 있다고 추측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어. '자신과 얼마나 닮았는가'." _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하지만 결국, 인간이 누구에게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는 단순한 습관일 뿐이야. '인간이 아닌' 인간은 역사상 얼마든지 있었어. 노예라든가, 식민지 주민이라든가, 다른 인종이라든가. 하지만 볼 수 있는 게 자신의 자아뿐이라면 그게 정말 자아인지도 증명할 도리는 없어." _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모순이 쌓이면 기계는 생각을 확장하는 대신 실행을 멈춰. 아니면 누구든 다른 사람에게 결정권을 넘겨. 실상 기계는 관료 사회의 경직된 인간처럼 행동해. 창의력이나 적극성을 갖지 않아." _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중력권과는 달리, 공허에 얹혀 있는 배에서는 모든 종류의 힘이 중력이 되고 추진력이 된다. 방금 10센티미터는 배가 쏠렸다. 우주에서 한 번 배를 밀어낸 힘은 마찰력 따위로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쪽에서 다시 힘을 줄 때까지 영원히 그 방향으로 힘을 가한다. 나는 다급히 천장의 통로를 올려다보았다.  _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인간의 이성과 양심을 과신하지 말 것. 그들은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인격만을 겨우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_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작품 목록

장강명 | 당신은 뜨거운 별에

배명훈 | 외합절 휴가

김보영 | 얼마나 닮았는가

듀나 | 두 번째 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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