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HONG[本]'은 일본어로 '책'이라는 뜻입니다.

Books/Book Review

조 월튼 『타인들 속에서』

| Mashimaro | 2020. 6. 30. 23:57






이책은 지금 생각해보니 참 오래동안 읽은 책이다. 사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 때 이렇게 긴 이야기인 줄 상상도 못했다. 리디북스에서 무료대여를 했을 즈음에 빌려서 읽다가 다 읽지 못하고 포기했던 것을, Yes24의 북클럽 무료체험기간 중에 다시 조금 접하다가 그마저도 다 읽지 못하고, 결국에 이번에 밀리의 서재를 통해서 읽게 되었다. 어쩌다보니 대여서비스를 전전하며 읽게 되었는데, 이미 읽기 시작했던 책이라 중간에 구입해서 다시 읽기도 뭐했던 점도 있고, 생각보다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는 원인도 있겠다. 


이 책은 아마 SF로 분류되어 있었던 것 같다. 뭐 일단, 출판사부터가 SF출판사로 유명한 아작에서 나왔고, 내용도 한 소녀의 평범한 일기같아 보이다가도 중간중간 자꾸 마녀이니 요정이니 하는 존재들이 튀어나온다. 사실 내가 이 책을 매우 늦게 읽은 원인은 여기에 있었던 것 같다. 워낙에 판타지류 혹은 SF류의 작품은 뭔가 꽂히는 부분이 없으면 사실 나와 잘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읽어갔던 것은 아마도 도대체 주인공 모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하는 궁금증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을 계속해서 읽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주인공 모리가 독서광이라는 사실이다. 모리는 쌍둥이 언니를 잃고, 엄마를 마녀로 표현할 정도로 가정사에 괴로운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사고로 인해 다리까지 불편해졌다. 이런 주인공이 자기가 주장하는 대로 마법을 통해서 독서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자기가 너무 좋아하는 책을 통한 인연들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소녀가 자신의 환경을 살아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세계관을 표현해주고 있는데, 그 매개 중 큰 역할을 하는 것이 책이기도 하다. 책을 좋아하는 한사람으로서 주인공이 작품 안에서 끝없이 뱉어내는 여러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정말 쏠쏠한 재미를 준다. 각 책의 해당작가들이 이 평가를 들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반면에 아쉬움이 남는 것은, 내가 여기에 등장하는 작품들의 절반도 읽어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특히나 주인공은 SF작품을 좋아하는데, 워낙 또 내가 잘 모르는 영역이기도 해서 더했던 것 같다. 


아무튼, 주인공 모리는 자신의 만든 세계관, 아니 혹시 정말 존재할 지도 모르는 그 마법과 요정들을 믿으면서 자신의 현실을 버텨간다. 초반에 읽으면서 이게 무슨소리인지, 터무니없는 이야기로만 들렸던 상황들이, 희한하게도 책을 덮음과 동시에 주인공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심지어 책 말미에 나와있는 저자의 프로필을 읽으면서 심각할 정도로 주인공의 삶과 닮아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 또한 진실인지 작가가 설정한 세계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쩄든, 나에게는 책을 다 읽고나서야 어느정도 이해가 되었던 작품이라는 점이 새로운 경험이었다. 




사람들은 늘 아는 걸 쓰라고 하지만, 난 지어내 쓰는 것보다 아는 걸 쓰는 게 훨씬 힘들다. 내 삶보다는 역사적인 한 시대를 조사하는 게 더 쉽고, 감정이 덜 실리는 것들과 좀 더 초연할 수 있는 장소들을 다루는 게 훨씬 더 쉽다. 그러니 이건 정말 끔찍한 조언이다! 그런 이유에서 웨일스 골짜기 같은 장소는 존재하지 않고 그 아래에 석탄도 묻혀 있지 않으며, 빨간 버스도 이리저리 달리지 않는 것이다. 1979년 같은 해는 절대 없었고, 열다섯 살 같은 나이도 없었으며, 지구 같은 장소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요정들은 진짜다.


또한 누군가를 필요로 하게 되면, 누군가가 당신을 꼭 도와준다는 거. 그게 부모님이 아닐 수도 있고, 심지어 할머니 할아버지조차 아닐 수 있지만, 만약 당신을 키워줄 누군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해지면, 누군가가 실비아 외증조할머니처럼 나서준다는 거다.


도서관은 모두 정말로 멋지다. 정말 도서관이 서점보다 낫다. 서점은 책을 팔아 수익을 내지만, 도서관은 그냥 자기 자리에 버티고 있으면서 순수하게 선의에서 조용히 책을 빌려준다. 


지난주와 날씨가 확 달라졌다. 지난 토요일은 온화하고 화창해서, 가을이 머뭇거리며 등 뒤로 여름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축축하고 바람이 거센 것이, 가을이 성마르게 겨울로 질주해간다. 


그 기억을 떠올리면 울적해지지만, 기억 속의 느낌 때문에 살짝 마음이 든든해지며 들뜨게 되기도 한다. 기억은 꼭 그렇게 둘둘 말아놓은 카펫 같아서 머릿속에 계속 말아두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지만, 원하면 다시 펴놓고 그 위를 걸으며 추억에 잠길 수 있다. 


이제 난 친구들과 재미로 테니스 치는 일조차도 없겠지만, 그렇다고 테니스 쳤던 일까지 헛되었단 뜻은 아니다. 할 수 있을 때 더 해둘 걸 그랬다. 도서관이든 권곡이든 계단이든 기회 있을 때마다 어디로든 뛰어갈 걸 그랬다. 음, 우린 계단을 오를 땐 거의 뛰어 다녔다. 난 테그 이모 집에 가려 힘겹게 아파트 계단을 오를 때면 그 생각을 한다. 계단을 뛰어 올라갈 수 있는 사람들은 뛰어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먼저 뛰어 올라가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남들 앞길을 막는다는 기분 없이 절뚝이며 뒤따라갈 수 있으니까.


이 기차는 웨일스 경계선을 따라 계속 달려간다. 언젠가 난 노스 웨일스에 가야 하고, 혹은 윔이 말한, 오스웨스트리에서 겨우 3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다는 그 웨일스 경계를 넘어가야 할 것이다. 난 그 경계를 내 지도에 표시해놨고, 이제는 안다. 지리학 시간에 바보 같은 빙하 작용이나 내내 가르치지 말고 지도를 가르쳐주면 좋겠다. 


책을 충분히 사랑하면, 책들도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들은 환각이 아니었다. 나무들이었다. 나무들은 종이의 원래 모습이고, 종이가 되고 싶어하는 대상이다. 


살아있는 동안은 계속 배울 것이다. 결국 나는 죽음에 이를 것이고, 죽을 것이고, 죽음을 통해 새로운 삶, 혹은 천국, 혹은 그게 뭐든 사람이 죽으면 겪게 되어 있는 알 수 없는 일을 맞을 것이다. 난 죽을 것이고 썩어서 내 세포들을 다시 패턴 속에서 생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그 순간 내가 어떤 행성에 있든지 간에.


마지막으로, 모리에게 책은 힘겨운 현실에서의 도피처였을까, 아니면 흑백논리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이 세상과 현실의 문제에 대해 이해를 도와주는 도구였을까. 후자의 경우, 일견 이 세상과는 상관없는 외계나 마법에 대한 책들이 눈앞의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 과연 적합할 수 있는 걸까. 그 대답으로 SF 독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말을 덧붙이고 싶다. "내가 SF에 대해 항상 좋아해 온 점 중 하나는, SF를 보면 여러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들을 여러 각도에서 보게 된다는 거다." (역자후기 _ 김민혜, '타인들 속에서, 타인들 속으로')




'공감'과 '댓글'이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