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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히가시노 게이고 『녹나무의 파수꾼』

| Mashimaro | 2020. 7. 3. 19:59






흠. 역시 나에게 있어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추리소설보다는 이런 따뜻한 이야기가 더 잘 어울리는 작가이다. 추리소설도 나쁘지는 않지만 가볍게 읽을 수 있다는 점과 오히려 너무 신파로 가는 느낌이 강한 느낌인데, 아예 본격적으로 이런 소설을 쓰면서 오히려 제대로 된 옷을 입은 느낌이다. 어떻게 보면 이 작품은 《나이먀 잡화점의 기적》과 비슷한 그룹으로 묶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의 매개체 혹은 매개물을 통해서 이야기한다는 느낌조차도 비슷하다. 이 작품에서는 녹나무가 그런 매개체의 역할을 하는 것일텐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라면 잡화점 건물이거나 혹은 우유상자의 역할이랄까? 


어쩄든 이런 판타지스러운 혹은 오컬드 스러운 소재는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최근에 무라카미하루키의 《태엽 감는 새》를 읽으면서 더 확실하게 느꼈던 듯) 왜 이 작품은 이리 좋았는지 모르겠다. 구성을 복잡하게 꼬아놓지도 않았고, 어떻게 보면 오히려 단순하기까지 한 이 이야기가 한편으로는 잔잔하고 지루했을 법도 한데, 오히려 끊지를 못하고 스트레이트로 주욱 읽어버렸으니 말이다.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가 이야기꾼임에는 틀림 없는듯 하다. 늘 술술 잘 읽힌다. 누차 (나혼자) 주장하고 있는 중이지만,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렇게 아예 대놓고 따뜻한 느낌의 소설이나, 오히려 에세이 쪽이 더 좋은 것 같다. 


하지만 어쩌면 소재가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어떻게하면 나무 한 그루를 통해서 이런 세계관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판타지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세계관만 확실하고 납득할 수 있다면야 오히려 언제든지 환영이다. 아무래도 녹나무라는 단순하면서도 심플한 세계관을 구성했으므로 오히려 복잡한 설정보다는 스트레이트로 전달되는 에피소드들이 더 와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인지증(이건 아마 일본식 표현을 일부러 그대로 번역해주신 듯)에 대한 소재가 곁들여진 것도 개인적으로는 인상깊었던 부분이었다. 관련된 개인적인 상황도 있고, 또 그로인해 요즘 유독 인지증이니 치매니 하는 소재들을 많이 접하고 있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 작품이 가장 좋았던 이유는 아마도... 해피엔딩에 가까운 결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혹시 작가도 내용에 자신이 있었던 것일까? 일본발매 후 번역이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시출간이었다고 한다. 이런 내용을 포함한 양윤옥 번역가의 역자후기도 인상깊었다. 내가 느낀점을 너무 제대로 표현해 준 느낌이랄까? 엄청 공감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새삼 느낀 점이지만, 워낙에 배태랑 번역가여서 그런지 글테도 얼마나 작가스럽던지. 책하나 내셔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기죽을 필요 없어요. 나는 이런 자리에 서는 게 당연한 사람이다, 라고 당당하게 나가면 됩니다. 다만 허세를 부려서는 안 돼요. 인간이란 허세를 부리는 사람보다 그런 게 없는 사람을 더 두려워하는 법이니까요.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알겠어요?"


"레이토는 이해를 못하겠지요. 젊은 레이토는. 기억해두고픈 것들, 소중한 추억들, 그 모든 것이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흘러내리듯이 사라져가요.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겠어요? 친하게 지내던 이들의 얼굴마저 차례차례 잊어버립니다. 언젠가 분명 레이토도 잊어버리겠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잊어버렸다는 지각마저 없어져요. 그게 얼마나 슬픈지, 얼마나 괴로운지, 레이토가 알겠어요?"


"네, 저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곳이 과연 어떤 세계인지, 치후네 씨도 아직은 알지 못하잖아요. 잊어버렸다는 자각도 없다면 그곳은 절망의 세계 같은 게 아니죠.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세계에요. 데이터가 차례차례 삭제된다면 새로운 데이터를 자꾸자꾸 입력하면 되잖아요. 내일의 치후네 씨는 오늘의 치후네 씨가 아닐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뭐, 그래도 좋잖아요? 나는 받아들입니다. 내일의 치후네 씨를 받아들일 거에요. 왜요, 그러면 안 됩니까?"


"고마워요. 하지만 녹나무의 힘은 필요 없어요. 방금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져오는 게 있다는 걸."


인간의 본성에 잠재한 악에 대한 이야기는 많은데 왠지 그 안의 선을 묘사하는 작품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선함은 재미있게 묘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의 독후감이 좋았다. 첫 인상이 그리 좋지 않은 등장인물들을 끝까지 추적해 기어코 그 밑바닥에 깊이 숨어 있는 선함을 찾아내고 있는데도 전혀 착한 척하는 지루함이 없다. 추리의 트릭을 이런 식으로 쓸 수도 있구나 하고, 대가의 힘을 뺀, 무한히 넓은 관용의 경지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옮긴이의 말 _ 양윤옥, '기어코 찾아낸 인간의 선한 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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