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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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복길 『아무튼, 예능』

| Mashimaro | 2020. 4. 1. 06:30






아무튼 시리즈는 내가 굉장히 좋아하는 시리즈이다. 감사하게도 구독서비스에 올라와 있고, 생각날때마다 몇권씩 골라서 읽고 있는데,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 실망한 적이 없다. 참고로 지금까지 완독한 책은 《아무튼, 문구》, 《아무튼, 술》, 《아무튼, 떡볶이》였다. 아무래도 이 아무튼 시리즈는 그만큼 좋아하는 것들, 빠져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언급하다 보니, 그 애정과 깊이가 확실해서 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앞서 읽은 세가지의 소재는 나 역시도 좋아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작가가 좋아서 읽은 책들이었는데, 이후에 어떤 작품을 고를까.. 하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이 ‘예능’이었다. 예능이라면 나 역시 즐겨보는 것이고, 다 챙겨보지 않더라도 적어도 어떠한 프로그램인지는 충분히 알겠다 싶어서였다. 그리고 과연 오타쿠적 혹은 매니아적 시각으로 예능을 들여다보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 가장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읽은 아무튼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가볍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사실 제목만 봤을때는 가장 가볍고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은 재미있다. 읽으면서 피식하는 실소도 계속 터져나온다. 공감되는 부분도 정말 많다. 하지만 진지한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읽는 사람에 따라서 꽤나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너무 좋았다. 오히려 한편으로 예능이라는 소재를 이렇게까지 깊게 생각하며 볼 수 있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다. 이 책을 읽고 생각해보니, 예능이라는 것은 TV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영향력있는 수단이고, 심지어 여기에 즐거움과 해학, 풍자등을 담아낸다. 누구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것이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것이 바로 이 ‘예능’일 것이다. 일단 이러한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벌써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또 이 책은 많은 부분에 대해서 나 자신의 생각과 저자의 생각이 상충하는 부분도 많이 발생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내 경우에는 그렇게까지 부딪치지는 않았지만, 꽤나 생각이 다르다고 느끼게 될 독자들도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오히려 이러한 부분이 이 책의 좋은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와 함께 생각을 부딪쳐가며 읽을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특정 프로그램 혹은 인물, PD 등에 대해서 아주 직설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한다. 그렇기에 다른생각을 가진 이들은 이부분을 읽을때 꽤나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예능에서 풀어내는 여성에 대한 스탠스, 혹은 여성예능인의 부재. 남성중심적인 예능환경 등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인상깊었다. 아무생각 없이 예능을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이정도까지..? 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하고 직설적으로 이러한 문제제기를 하는 저자의 모습이 좋았다. 

결론은 나는 이 책이 절대 가볍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이것이 또한 아무튼 시리즈이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가볍게 읽으려고 꺼내들었던 책이 굉장히 인상깊은 책이 되어버렸다. 이래서 내가 아무튼 시리즈를 좋아한다. 




알고 있겠지만 이런 인테리어 예능은 집을 잘 구하는 팁을 알려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쳐버렸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 부동산 가격과 도무지 어떻게 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기이한 집과 방에 대한 고발 르포다.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에 올라온 기상천외한 매물들을 보며 남 일처럼 웃다가 정말 그 집이 내 앞에 나타났을 때 그냥 길바닥에서 자고 싶다는 피로를 느끼는 것처럼.

그때는 몰랐다. 내 방이 그 어설픈 독립 선언과 함께 사라지게 될 거라는 걸. 기숙사와 오피스텔, 수많은 자취집을 옮겨 다닐 동안 늘 그대로일 것 같았던 ‘내 방’은 이사를 거듭할 때마다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렸고 그렇게 10년이 지난 뒤, 나에게 남은 짐은 여행 캐리어 하나였다. 그것이 내 독립의 결과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왜 한 건지도 모를 말들을 내 인생에 덕지덕지 갖다 붙였다. 아무것도 훈련되지 않고 할 계획도 없는 자신을 향해서 계속 믿는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었다. ‘나는 나를 믿는다.’ 이 말 하나로 나는 내 모든 생각과 행동을 승인하고 스스로를 자주 속였다.

한국 사회에서 지방 자체가 소외나 박탈감을 느끼기 쉬운 공간이지만, 미디어의 극단적인 서울 중심주의는 서울에 대한 지방의 식민성을 확대하고 불만을 부추기고 좀 과장되게 말하자면, 서울에 가야 저런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는 빠지기 쉬운 착각을 조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방 청년들에겐 그렇게 조성된 미디어의 환경 자체가 삶의 어떤 한계로 작용하기도 하는 것 같다.

사연이 중심인 수많은 라디오 프로그램이나 〈안녕하세요〉, 〈마녀사냥〉, 〈연애의 참견〉 같은 사연 예능들도 비슷한 문제들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질문자와 답변자의 견해 차이에서 오는 재미를 즐기지만, 정작 제대로 된 솔루션이 필요한 문제 앞에서는 난감함을 드러내다 결국 무책임하게 마무리된다. 나는 고민 앞에서 냉소하지 않는 이 방송들의 취지가 좋다. 그래서 문제적인 고민들을 회피하거나 자극적인 소재로 사용하고 마는 것이 매번 아깝다.

어떤 고민은 가십이 되기도 하고 어떤 고민은 큰 변화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지상파 방송의 ‘예능’이라는 장르는 한계가 되기도 하지만 사람들의 접근이 쉬운 만큼 쟁점을 만들기도 쉽다. 시시콜콜한 잡담형 고민들로 웃는 것이 가능하다면 문제적인 고민들을 다양한 관점으로 다루며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고민에 경중은 없지만, 그 고민을 풀어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결혼을 하는 애들은 왠지 다 어른 같아 보였다. 어깨를 흔들면서 물어보고 싶었다. 다들 왜 그러는 건데? 왜 갑작스럽게 철드는 건데? 이런 어른스러운 태도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빨리 배운 거지? 어제까지만 해도 나랑 같이 아무 생각 없었는데. 수년 만에 만난 사촌 동생한테 “나는 아직도 니가 결혼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아!” 하니까 “그냥 한 거지 뭐. 언니가 결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라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결혼 자체를 대단하게 생각한다기보단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 자체를 신기하고 심각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 비혼으로 살기 위해서는 결혼보다 더 철저한 계획과 굳은 결심이 필요한 것인데, 나는 그저 결혼이란 제도에 역정을 낼 뿐 딱히 비혼으로 살아갈 의지도 없는 무위의 상태인 거다. 어릴 때 누가 결혼에 대해 물어보면 막연한 먼 미래를 말하듯 이유도 없이 그냥 ‘난 안 할 거야’ 하 는 것처럼. 그러나 ‘비혼은 결심해야 하는 건가? 그냥 안 하면 자동으로 되는 게 비혼 아닌가?’ 했던 것은 나의 착각이었다. 예능들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이곳은 결혼이 삶의 기본 형태인 곳이다.

책임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 자꾸만 버겁다. 10대 때는 무책임한 누군가를 지탄하는 것이 삶의 원동력이었는데, 진짜로 이제는 누굴 욕할 처지가 못 된다는 생각에 밤에 잠도 안 온다. ‘난 내가 욕하던 어른과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자랐을까. 누구를 탓하고 욕하는 만큼 나는 내 앞가림을 잘하고 있나.

불안은 자꾸만 여러 선택들을 빨리 결정하도록 보챈다. 그때마다 나는 템포를 늦춰볼 생각이다. 어떤 지혜나 현명함을 요구하는 분위기에서 벗어나 나에게 닿아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계획을 세워보자고. 결심과 선택이 필요한 순간에 용감해지고, 나만의 원칙을 만들어 지키자고.

넘겨짚는 것이지만 그런 업계에서 긴 시간 버텨오면서 여전히 ‘여성’인 자신을 내세워 이야기할 때 누군가를 설득할 힘이 남아 있다는 것은 씁쓸하지만 대단한 일이다. 끝없이 생각과 말을 단련한 결과처럼 보였다. 배우고 싶었다.

나는 미디어 속 여성 화자들이 너무 부드럽고, 너무 설득적이고, 너무 방어적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그래서 볼륨이 크고 화법이 거친 여성들이 좋았다. 하지만 요즘엔 말의 세기 못지않게 조금 덜 거칠어도 방향을 잃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이는 지구력도 중요한 것 같다.

한 해의 마지막을 모든 방송사가 시상식으로 때우고 마는 것도 그만큼 한국이 연예인에 미친 나라라는 방증이다. 그러나 연예인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퍼포먼스 면에서 구성이 미흡한 한국 시상식을 재미없어할 수밖에 없다.

지금 아이돌 서바이벌이 〈슈퍼스타 K〉나 〈케이 팝스타〉와도 달라진 점이 있다. 참가자들은 늘 두 손 을 공손하게 모으고 어딘가 주눅이 들어 있다. 말 못하는 캐릭터가 주인공인 아동용 만화처럼 말랑말랑 하고 단순한 태도만 남은 참가자들은 짧은 시간 동안 뭐라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과 불안을 통째로 내비친다. 시청자들은 점점 화면을 분해해서 엔딩의 각도, 애교할 때의 포즈, 윙크하는 모습 같은 것들에 집착하고 ‘꿈을 응원해달라’, ‘노력을 기특하게 여겨달라’는 방송의 형식적인 메시지는 책의 띠지처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케이팝 아이돌 예능을 제작하는 사람들에게 ‘WE ARE K-POP’이란 문장은 완벽하다. 자신만만한 감정은 담겨 있으나 산업 자체가 소비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감까지 내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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