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아니게 요즘 페미니즘 관련 책을 참 많이 읽게 되는 것 같다. 특히나 《82년생 김지영》이나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같은 실질적인 사례들이 모티브가 되어있는 책들을 유난히 많이 읽게 된 것 같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서는 한국의 사례를,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를 통해서는 일본의 사례를 엿보았고, 이 두책의 공통점은 결혼생활을 통해 나타나는 갈등을 다루었다는 점이다. 이 책 《나쁜 페미니스트》는 미국의 사례가 중심이 되어있고, 저자인 록산 게이는 흑인여성이다.이 책은 이전에 읽었던 《악어 프로젝트》와 같은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포문을 여는데, 《악어 프로젝트》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범위를 다루고 있다.
일단 이례적인 것은, 저자는 자신을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지칭힌다. 내가 이 책에 집중하고 읽을 수 있게 된 것도 이러한 부분이 한몫 했던 것 같다. 가장 먼저 저자는 페미니즘이란, 페미니스트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부터 던지고 시작한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리가 페미니즘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정확히 지적해 준 부분이었다.
페미니즘이 우리 기대에 못 미치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행동하는 인간들에게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페미니즘 자체가 잘못되었다며 정죄한다.
최근 페미니즘이 이런 이유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우리는 페미니즘과 그것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며 자기의 브랜드로 만들려는 여성들을 서로 동일시해 버렸다.
그렇다. 저자는 우리가 페미니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 혹은 '선입견'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이 과연 무엇인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를 제시하려고 부던히 노력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페미니스트라고 자처함에도 불구하고 여성비하적인 문화나 사회에 어느정도 동화되고 그 문화를 즐기기도 하는 자신의 모습을 빗대어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굉장히 공감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을 이러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페미니스트이고자 하나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모순들. 실질적인 싸움들. 이러한 부분을 저자는 솔직히 오픈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해준다.
책의 후반부에서는 페미니즘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오히려 흑인문제를 주로하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문제를 꽤나 집중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부분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부분인 듯하다. 이 또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지만, 확실히 집중도가 떨어지는 면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여성문제, 인종차별문제를 같은 맥락위에 올려두고 기본적인 권리와 평등에 대해서 재고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나 또한 유색인종이긴 하지만, 흑인만큼의 차별적인 경험을 한 적이 없고, 또 그랬던 만큼 알지못하는 부분 혹은 크게 실감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았다. 이러한 면에서는 또다른 부분을 느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아무튼 이 책은 '페미니즘' 그 자체의 원론적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주는 것 같다. 미국의 사례가 중심으로 되어있지만, 이는 우리에게도 맞닿아있는 문제이고, 또 한편으로는 미국사회 또한 매우 보수적인 곳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씁쓸하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는 페미니즘을 부인하곤 했다. 나는 왜 여성들이 아직까지도 페미니즘을 부인하고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려다 자기 발에 자기가 걸려 넘어지는지 이해한다.내가 가끔 손사래를 치며 나는 절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 이유는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이 마치 인신공격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페미니즘을 부인했다. 이 운동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소리를 들으면 이런 말로 들렸다. "너는 성깔 있고 섹스 싫어하고 남성 혐오에 찌든, 여자 같지 않은 여자 사람이야."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는 페미니즘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 페미니즘이 성공하면 잃을 것이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부정하고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걸 거부하면서 페미니즘에서 잉태된 모든 발전과 변화를 지지한다고 말할 때는 솔직히 화가 난다. 이 두 가지를 굳이 분리하려고 애쓰면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물론 한때 나도 그랬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고 언젠가 우리 모두 페미니스트란 단어에 거리를 두지 않아도 될 문화에 살기를 희망하고 있다.
우리는 인종과 종교와 정치를 이야기할 때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워낙 민감하고 까다로운 주제이기 때문에 내용뿐만 아니라 표현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태도는 폭력, 특히 성폭력에 대한 글을 쓸 때까지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제목처럼 남성의 몰락과 여성의 비상이 반드시 맞물려야 하는 것일까? 여성이 이전 어떤 시대보다 잘 해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남성의 몰락을 의미할까?
정의로운 척이 정의를 방해한다. 정의로운 척은 다른 상황에서 조심스럽고 사려 깊게 공유되었더라면 유효했을 의견을 방해한다.
어쩌면 그건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내가 여기에 속할 만큼 충분히 똑똑하지 않고 세상 사람 모두가 그걸 알게 된다는 것.
당신의 특권을 인정한다고 해서 당장 일어나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니 걱정은 붙들어 매라. 그에 대해 미안해하고 사과할 필요도 없다. 그저 당신 특권의 범위와 영향력을 이해하고 당신이 전혀 감도 못 잡는 방식으로 이 세상을 헤쳐 나가고 경험하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 인식하고 있으면 된다. 그들은 당신이 눈곱만큼도 모르는, 한 번도 겪지 않고 겪을 필요 없는 상황을 하루하루 견디고 있다.
나는 '페미니스트'의 정의 중 1996년에 출간된 케시 베일의 책 《DIY 페미니즘》에 실린 호주 작가 수Su의 인터뷰 중 한 대목을 가장 좋아한다.그녀는 페미니스트란 "개똥 같은 취급을 받고 싶어 하지 않는 여성일 뿐"이라고 말했다.
적극적이고 자기주장이 강하면서도 페미니스트 딱지만큼은 피하려는 여성, 이것이 붙었을 때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여성이 나 혼자만은 아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정중하게 거절하는 여자가 되고 싶지 않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내가 페미니스트이자 솔직한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이름이다.
나는 나쁜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아예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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