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를 읽고 나서 이렇게 흥분하게 된 것이 과연 얼마만인가..! 너무너무 재미있게 시간가는 줄 모르고 정말 후딱 읽었던 것 같다. 사실 천문학이라는 분야는 몰라도 너무 모르는 분야인데, 친구들과 《코스모스》를 함께 읽기 시작하면서 도움이라도 되어보고자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를 읽었고, 이어서 이 책을 발견하여 읽게 되었다. 사실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도 너무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 책은 그보다도 더 재미있었던 것 같다.
둘 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책에 가깝지만, 이번에 읽은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쪽이 확실하게 에세이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즉 작가가 천문학자이기에 천문학적 소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있지만, 에세이인 만큼 작가의 비정규직 연구자로서의 이야기, 여성연구자 혹은 어머니, 여성..으로서의 이야기, 강의를 하는 교수로서의 이야기, 박사가 되기까지의 과정 혹은 박사로서 살아가는 이야기 등...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양한 에피소드와 강력한 글빨로 나눠주고 있다.
솔직히 읽는 내내 부러움과 감탄과 웃음을 머금으면서 읽었던 것 같다. 이렇게 글을 잘쓰는 능력... 내가 너무나도 갖고싶은 능력인데.. 연구도 충실하면서 이렇게 글까지 잘쓰다니, 정말 너무너무 부러워서 질투가 날 지경이다. ㅎㅎ 어쨌든 등장했던 에피소드들 중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에 대해 디스아닌 디스를 한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공감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그랬나? ㅎㅎ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박사에 대한 챕터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이제는(?)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도 참 많으리라... 개인적으로는 박사가 되는 과정들, 그리고 여성연구자 혹은 비정규직 연구자에 대해 나누어준 모습들은 정말 푹 빠져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이 또한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리라...
나 역시 다음 자리를 준비하고 있는 순수학문 분야의 여성 연구자로서 고민이 많은 시기에 이 책을 읽게 되어 더 심하게 공감하며 읽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에필로그에서 나누어 준 부분은 오히려 힐링까지 될 지경이었다. 나와 같은 가면증후군을 겪고있다니... 진지하게 내가 연구직에 맞는 사람일까..를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나로서는 또 다른 포인트에서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읽는 에세이스트로 김혼비 작가가 있는데, 이제는 또 한명의 에세이스트가 추가될 것 같다. 그리고 심채경 '작가'로서도 심채경 '연구자'로서도 앞으로 계속 응원하게 될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도중에 그만두지 못했던 것은 떠날 용기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남은 채 버텨내는 데도 역시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떠난 이들은 남지 못한 게 아니라 남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고, 남은 이들은 떠나지 못한 게 아니라 떠나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제는 안다. 어느 쪽을 선택했든 묵묵히 그 길을 걸으면 된다는 것을.
박사가 되는 것은 내 이름 외에 불멸의 호칭을 하나 더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박사가 훌륭한 학자인 것은 아니며, 모든 질문에 학문적으로 옳은 답을 내놓는 척척박사인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자, 박사가 되었으니 이제부터 갑질을 시작하지’ 따위의 상황도 절대로 오지 않는다. 그저 박사학위는 운전면허 같은 것이라는 너스레를 떨 수 있을 뿐이다.
결국, 나는 한 번도 『코스모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못했다. 책에서 다루는 모든 분야에 대해 얕은 지식이라도 있다면 저자의 통찰력에 감탄하고 새로운 눈을 뜨게 됨에 매 문장마다 감사할 테지만, 몇 문단 지나면 어느새 그저 한 사람의 활자 중독자가 되어 눈앞의 글자를 읽어내리며 ‘명상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언제쯤이면 이 책을 읽는 내내 칼 세이건과 함께 감동의 도가니에 빠질 수 있을까.
내가 『코스모스』를 읽을 때의 모습은, 동생이 끼워준 이어폰을 차마 내던지지 못한 언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좋은 작품이고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뭐 꼭 나까지 그렇게 같이 좋아야만 하는가 싶은 바로 그 표정 말이다. 칼 세이건은 긍정적인 의미로 대단한 선동가였다. 나만 그렇게 표현한 게 아니라, 저명한 천문학자 크리스 임피도 『우주 생명 오디세이』에서 “칼 세이건은 선동가이자 엔터테이너였다”고 썼다. 문제는, 미안하지만 나는 사람 선동하는 책은 딱 질색이라는 점이다. ‘저기요, 제 감동은 제가 알아서 느낄게요’ 하면서 삐딱선을 타버린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번역본이 나왔다길래 샀다. 몇 차례 읽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다시 깨달았다. 번역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 뭐 꼭 그렇게 하늘과 우주에 대한 감동으로 전율을 느끼는 사람만 천문학을 전공하라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우리는 우주인 이소연이 지상 훈련에서, 우주 실전에서, 그리고 우주에 다녀온 뒤에 겪은 모든 이야기에 귀기울여야 한다. 그가 무슨 실험을 했는지 하나라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신비롭고 놀라운 우주 이야기부터 그에 못지않게 놀라운 과학정책 이야기까지, 오직 이소연만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 그 교훈을 얻으려고 우리는 그를 우주정거장으로 보냈던 것이다.
어떤 수험생이 메모지에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다’라고 써서 책상에 붙여놓자 이과생이 와서 속도에는 이미 방향 개념이 들어 있다며 ‘속력’으로 바꿔 쓰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남의 일이 아니다. 아는 교사가 환경 교육 자료를 공들여 만들면서 ‘초록별 지구’라고 써놓은 것을 보고 지구는 별이 아니라 행성이라고 했다가 이래서 이과생은 안 된다며 의절당할 뻔했다. ‘행성’에 이미 별 성星자가 들어가지 않느냐는 지적에 딱히 반박할 말도 없었다. 참고로 천문학에서 별은 행성, 위성, 혜성 같은 천체를 제외하고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를 말한다.
나를 더욱 곤란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대단한 계기로 천문학을 선택한 것도, 어릴 때부터 오매불망 천문학자가 되기만을 그리다 마침내 꿈을 이룬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누구에게나 각자 인생의 흐름이 있는 것이고, 나는 삶을 따라 흘러 다니며 살다보니 지금 이러고 있다.
언론은, 어쩌면 사람들은, 대단한 과학자를 집중 조명하고 싶어한다. 고난을 극복한 영웅담에 빨리 감탄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과학자를 여럿 키워서 그중 한 사람이라도 대단해지는 과정을 지지하거나 지켜보는 것은 별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다. 세계적 과학자가 어디서 뿅 하고 갑자기 나타날 리 없는데.
다들 자기가 좋아하는 연구 하고 싶어서 이 세계에 발을 내디딘 사람들이다. 하지만 평생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돈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야 월급도 계약 기간도 과제에 달린 박사후연구원들에게는 학문의 세계가 그렇게 신성하지도 낭만적이지도 않다.
해 지는 걸 보러 가는 어린 왕자를 만난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장미 옆에서 가로등을 켜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왜 슬픈지 캐묻지 않고, 의자를 당겨 앉은 게 마흔세번째인지 마흔네번째인지 추궁하지도 않고, 1943년 프랑스프랑의 환율도 물어보지 않는 어른이고 싶다. 그가 슬플 때 당장 해가 지도록 명령해줄 수는 없지만, 해 지는 것을 보려면 어느 쪽으로 걸어야 하는지 넌지시 알려주겠다. 천문학자가 생각보다 꽤 쓸모가 있다.
천문학자들은 우주에 가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게다가 달 과학을 한다니, 살아생전에 못 간다면 죽어서 뼛가루라도 달에 뿌려지길 바랄 사람이 아닌가! 흠. 뼛가루가 되어서라면 모를까 살아서는 가고 싶지 않다. 미국이나 유럽까지 비행기를 타고 가는 열 몇 시간. 비좁은 좌석에 스스로 갇힌 채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꾸벅꾸벅 졸다 깨서 숫자 퍼즐 전문가 단계를 수십 판 깬 뒤에도 여전히 구름이 발아래 펼쳐져 있으면 옆자리 승객의 눈치를 보며 한껏 내적 몸부림을 쳐보는 나다. 이봐요, 이 상태로 지구에서 달까지 간다고요? 저 여기서 좀 내릴게요. 그래요, 지금 당장요. 약은 약사에게, 과학은 과학자에게, 그리고 탐험은 탐험가에게 맡깁시다. 저의 지구력은 지구에서만 발휘할 수 있거든요.
과학 논문에서는 항상 저자를 ‘우리we’라고 칭한다. 물론 과학 논문은 대부분 여러 공동연구자가 함께 내용을 채워넣기 때문에, 우리라고 쓰는 것이 당연해 보인다. 문제는 학위논문이다. 석사학위와 박사학위 논문의 저자는 당사자 한 명인데, 그래도 논문을 쓰는 저자를 자칭할 때 ‘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학위논문을 쓸 무렵에는 교수님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고 선배들도 그렇게 했기에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따라 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학위를 받고도 한참이 지난 후였다. 연구는 내가 인류의 대리자로서 행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쓰는 것이다. 그러니 논문 속의 ‘우리’는 논문의 공저자들이 아니라 인류다. 달에 사람을 보낸 것도 미항공우주국의 연구원이나 미국의 납세자가 아니라, ‘우리’ 인류인 것이다. 그토록 공들여 얻은 우주 탐사 자료를 전 인류와 나누는 아름다운 전통은 그래서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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