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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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이적 『지문 사냥꾼』

| Mashimaro | 2020. 11. 16. 12:50







흠.. 책 표지와 제목만 봤을때에는 내가 절대 선택하지 않을만한 책이었을텐데... 가수 이적씨가 지은 소설집이라 하기에 궁금증이 일었다. 그의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 속 가사에서 엿보이는 그의 생각을 좋아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책을 읽다보니, 제목 옆에 붙어있는 '이적의 몽상적 이야기'라는 표현이 정말 적절한 책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나는 어릴적부터 지금까지 가끔씩 머리속으로 스토리를 만들어내곤 한다. 물론 자주있는 일도 아니고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만는 것도 아니지만, 가끔씩 뜬금없이 머리속에서 대사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현재 상황과는 다른 어떤 일상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뭐 그러다가 혼자서 피식 웃으면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거야...하면서 금새 돌아오기는 하지만. 근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그런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면 일상속에서 너무 당연하게 접하고 있는 상황, 사물 등에 온갖 상상력을 쏟아놓았다. 〈제불찰 씨 이야기〉, 〈지문 사냥꾼〉과 같이 비교적 긴 스토리를 제외한다면 습작이라 해도 좋을 만큼 짧은 이야기들이 많은 편인데, 어떤 스토리와 구성을 풀어낸다기 보다 상상력과 기발함을 느끼게 하는 인상이 강했다. 뭔가 책 자체가 상상력 축제의 장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이 책에 대해서 가장 표현한 것은 김영하작가가 쓴 〈글 쓰는 이적〉 속에서 나온 표현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우리나라의 문학적 전통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글들이다. 오히려 18, 19세기 유럽의 고딕풍 환상문학에서 그 연원을 찾아야할 글들이다. 노래하는 이적, 그 잔상을 지우고 읽어도 그 자체로 재미난 글들이며 그 상상력의 기괴함과 능청스러움에 사뭇 놀라게 된다. 역시 글이란 장인적 훈련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숨어 있는 괴물이 대신 써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부분의 글들이 짧은 편이어서인지 단편소설에 대한 평가가 대체로 박한 나로서는 미친듯이 좋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우리 일상을 상상계로 가져가는 그의 생각과 기발함이 엄청 참신했다. 그리고 어느정도 길이가 있는 〈제불찰 씨 이야기〉, 〈지문 사냥꾼〉과 같은 작품은 진짜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역시 나는 어느정도 스토리가 구성되어야 납득이 가는 스타일인가보다. 어쨌든 그의 재능은 언제나 놀랍고 부러울 따름이다. 




어느 곳에서나 제씨는 사람들의 정신을 지탱하는 기둥이란 것이 무척이나 허약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위태로운 흔들거림 속에서도 정신의 붕괴와 폭주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쓰는 버팀목들을 보며 그는 복잡한 심경에 빠져들었다.


L은 망연자실하여 군중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시의 시민들이 모두 모인 것 같았다. 밤마다 거리를 달릴 땐 코빼기도 볼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어쩌다 하나씩 걸려들면 그의 발밑에 엎드려 목숨을 구걸하던 가련한 족속이었다. 그런 그들이 이렇게 떼로 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악하고 공격적인 짐승들로 변하는 것이다. 그는 이 족속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다. 단둘이 있을 때는 친절하게 빵을 잘라주던 녀석도 친구들과 섞이면 그에게 침을 뱉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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