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정말 페미니즘 관련서적이 참 많아진 것 같다. 그리고 예전과는 다르게 조금 더 실질적인 이야기들을 구체적으로 하는 책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읽으면서 이해도 비교적 쉽고, 또 그만큼 조금 더 디테일하고 심도있는 이야기들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참 좋은 것 같다. 하지만 또 이러한 페미니즘이라는 장르 자체에 과도하게 날을 세우면서 대립하게 되는 새로운 현상들도 나타나고 있는 듯 하다. 현재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지 않기에, 어느정도 첨예한 분위기인지는 실감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이전에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독서커뮤니티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러한 사안들이 꽤나 민감하고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도 했다.
이 책의 가장 특이한 점이라고 한다면, 저자의 성별이 남성이라는 점이다. 사실 아무생각 없이 제목만 딱 보았을때에는 누가봐도 여성의 입장에서 꽤나 독설적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남성이다. 그리고 그는 페미니스트이다. 남성 페미니스트, 혹은 남성 페미니스트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요즘 꽤 있다. 아니 적어도 내 주위에서는 꽤 보이는 듯 하다. 저자가 책 속에서도 언급하기도 하지만, 분명 남성 페미니스트들은 굉장히 특수한 입장일 것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그리고 그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입장에 서있던 간에, 본인이 직접적으로 경험하기 힘든 상황에 대해서 열심히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나 역시도 꽤나 여러가지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있지만, 나조차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도 있으며, 생각보다 더 심각하게 화를내며 읽을 때도 있다. 저자만큼 확실하게 '나는 페미니스트이다'라고 이야기할 자신도 없다. 그러나 나역시 나와 내 주위에서 직접 겪거나 보고 들은 사례들이 너무나도 많다. 또 그렇다고해서 모든 남성들이 무작정 모두 나쁘다라고 할 수도 없다. 내가 경험하고 살아온 환경과 문화, 습관들은 설사 노력한다고 해도 쉽게 부정할 수 있거나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기에, 지금까지의 것들이 너무 당연하게도 부정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이것들은 다 용인해야 한다는 입장도 아니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오히려 저자와 같은 이들의 생각의 전환이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다.
이 책의 좋은 점은, 그러한 남성의 시선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느 드세보이는(?) 여성들의 발언보다 결코 약하지 않다. 오히려 남성이기 때문에 조금 더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해주는 느낌마저 든다. 내 입장에서는 참 고마운 부분이다. 그저 이성에게 공감받는 것 자체로도 어느정도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냥 왠지 양성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희망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현실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있다. 어쨌든, 나는 이러한 시도들을 환영한다. 페미니즘이라는 것은 결국, 싸움을 하기위한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기위한 것이라고 난 생각하니까. 어떠한 형태로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시도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남성 집단에서, 나를 포함한 ‘평범한 남자’들은 모두 일상적으로 여성혐오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여성을 억압하는 구조를 만들어 가는 데 공조했다.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 김보라 감독의 영화 〈벌새〉 등 여성의 삶을 다룬 작품에서 여자 주인공을 곤경에 빠트리는 남자 가족들은 지극히 평범하다. 이는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 부분이다. ‘가해자’는 먼 곳에 있지 않다.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이론이자 운동이다. 동시에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비뚤어진 남성성을 바로잡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남성을 만들어 가며, 기존의 남성성을 해체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남성들을 착각의 늪에서 구해 내고, 여성과 동등하게 관계 맺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은 남성에게 필요하다.
한국에서 남성은 ‘과도하게’ 눈치 안 봐도 되며, 느긋하게 생활할 수 있다. 남성은 둔감해도 문제없으니까, 오히려 둔감한 남성이 더 선호 받으니까 그렇게 산다. 그런데 둔감한 남성과 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은 ‘과도하게’ 주변을 살피며 불안해해야 한다. 누군가가 필요 이상으로 편하면, 누군가는 필요 이상으로 불편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적 의미에서 ‘귀 기울여 듣는다’라는 것은 단순히 듣는 행위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단의 목소리를 듣는 행동은 궁극적으로 응답해 주기 위한 준비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목적을 갖고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20대 남성들은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싫어한다 해서 페미니즘이 없어지진 않는다. 여성들은 절박하다. 계속 목소리를 내며, 자신이 겪는 부당한 차별과 폭력에 저항할 것이다. 그러므로 역차별론을 주장하는 20대 남성에게 계속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다며, 이해하고 ‘우쭈쭈’ 해 주는 것은 임시방편이자 희망 고문일 뿐이다. 해법이 될 수 없음은 물론, 오히려 그들을 도태시키는 꼴밖에 안 된다.
사회적 약자의 언어는 드러나기가 쉽지 않아 생소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폭력으로 가정이 깨져서 문제가 아니라 웬만한 폭력으로도 가정이 안 깨지는 게 더 큰 문제가 아닐까요?’ 이렇게 반문하면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기존의 사고방식과 다르기 때문에 어렵게 들리는 것이다.
안정된 사회적 위치에 오른 ‘중년 비장애인 남성’이 읽기 쉬운 글, 애쓰지 않아도 공감할 수 있는 글, 마냥 흡족해하는 글만 나오는 사회는 불행하다. 그들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권력을 고착화하는 반지성주의 행태가 지속되면 ‘불편한 글’은 더욱 나오기 힘들어진다.
여성의 소비를 재단하는 사고의 기초에는 ‘여성은 남성의 돈을 쓰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은연중에 깔려 있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아빠, 대학생 때와 사회 초년생 때는 남자 친구, 결혼해서는 남편에 의존해 경제생활을 한다는 생각 말이다. 일하는 여성이 늘고 있음에도 아직 인식의 변화가 크지 않다.
침묵하지 않겠다던 남자들, 지금 뭐 하고 계십니까? 여성들은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해 나가는데, 왜 남성들은 여전히 꼿꼿하게 그 자리에서 ‘에헴’ 하며 훈장질로 일관하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남성들이 단순히 ‘성평등 의식’을 지니고 있다 해서 저절로 체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배우고 고민하고 부단히 관심을 가져야 한다. ‘나 정도면 괜찮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나 아니었고, 아마 당신도 아닐 것이다. 자신이 깨어 있다고 자부한다면 현재 진행형으로 여성들과 함께 고민하고 싸우며 그 속에서 성찰과 변화의 목소리를 내야 마땅하다.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소득과 학벌이 나보다 조금 잘난 남자를 만나라’는 말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여성들이 속물이거나 가부장제를 비판 없이 수용해서가 아니다. 상당수 남성이 자신이 만나는 여성보다 무능하다고 느낄 때, 열등감에서 비롯한 피해의식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여자가 어떠한 압박을 주지 않는데도, 남자 스스로 가부장제의 끈에 묶여 온갖 힘든 척 불쌍한 척 다 하며 자기혐오를 드러내니 옆에서 견딜 수가 있겠는가? 물론 애초에 ‘잘난 여성’을 만나는 것조차 부담스러워한다.
‘분노하지 말고, 반성하라.’ 남성들이 양진호 사건에서 지녀야 할 태도다. 다른 이슈라면 모르겠지만 적어도 디지털 성범죄 영상 문제와 관련해 남성들은 그저 속죄해야 한다. 남성들은 20년 가까이 아무 죄의식 없이 디지털 성범죄 영상을 공유하는 구조를 유지해 왔다. 이제라도 문제를 깨달았다면 과거를 반성함은 물론,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연대하며 함께 ‘갱생’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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