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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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조남주, 최은영, 김이설, 최정화, 손보미, 구병모, 김성중 『현남 오빠에게』

| Mashimaro | 2019. 11. 27. 09:52



일본어 리뷰 [Japanese Review]

チョ・ナムジュ、チェ・ウニョン、キム・イソル、チェ・ジョンファ、ソン・ボミ、ク・ビョンモ、キム・ソンジュン 『ヒョンナムオッパへ』




이 책을 왜 이제서야 읽었을까.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이렇게 많이 참여한 소설집인데 말이다. 요 몇년사이에 페미니즘에 관련된 책을 참 많이 읽기도 했는데, 그만큼 또 너무 편중되는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서 자제하기도 했었고, 또 좋아하는 작가들의 다른 작품도 많이 읽었던지라, 굳이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전면적으로 걸어놓고 여러 작가들이 모여서 작업한 단편집을 당장 읽어야할까? 라는 생각이 내 발목을 잡았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첫 작품이었던 조남주 작가의 '현남 오빠에게'를 읽기 시작하는 순간, 이런 저런 생각없이 그냥 책을 붙잡고 읽기 시작하게 된 것 같다. 


확실히 조남주 작가는 현실을 정말 잘 그려내는 작가인 것 같다. 디테일한 것 같으면서도 너무 깊이 파고들지 않게, 그리고 담담담하게 이야기를 서술해 가는 것이 정말 독자들이 읽기 쉽도록 잡아당기는 글을 쓰는 것 같다. 특히나 그녀, 이름은에서는 작품 전체가 그러한 느낌이다. 이 작품집이 르포인지 소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어쩌면 그렇게 현실을 잘 그려내는지. 게다가 두번째 배치된 작품이 내가 너무 좋아하는 최은영 작가의 작품이었으니, 책을 놓을 수 없는 건 당연한 것이었을지도.역시나 이번에 실려있는 작품도 너무 좋았다. 최은영 작가는 정말 잔잔하게 글을 쓰는 것 같은데 그 안에 묵직한 것들이 항상 들어있다. 그래서인지 최은영 작가의 《쇼코의 미소》는 나의 최애 단편집 중 하나이다. 그리고 다른 작품들도 꽤 공감을 해가며, 혹은 으응? 하며 어렵다고 느낀 작품들도 있었는데.. 그러다가 다시 한번 눈을 딱 뜨이게 했던 작품, 그건 구병모 작가의 글이었다. 구병모 작가의 작품은 아직 《파과》 밖에 읽지 못했는데, 내가 이러한 장르를 좋아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이분은 확실히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사실 중반부터는 작가이름을 거의 신경쓰지 않고 그저 소설만 줄줄 읽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읽다가 '어? 이거 누가썼지?'라는 생각에 작가이름을 확인하고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대체적으로 나에게는 좋은 작품들이었고, 또 마지막 이민경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 또한 여러 문학작품을 읽으며 별로 고민하지 않았던 부분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실 이민경 작가의 글은 언제나 나에게 있어서 조금은 강한어조로 들려서 주저하게 하는 부분들도 있지만, 그래도 공감하는 부분들도 너무 많기에, 늘 거르지는 않고 찾아읽어보게 되는 것 같다. 그렇다. 우리에게 페미니즘이란 서로 생각하는 강도도 다르고, 무엇보다 표현하는 법들이 다들 다르다고 생각되지만, 우리가 공통으로 느끼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로 인해 '공감'하는 시간들도 필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작가들이 각각 다르게 표현하는 페미니즘을 통해서 여러가지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 것 같아서 나에게는 좋은 시간이었다. 





청혼이든 권유든 부탁이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 마음에 들게 하는 겁니다. 그래야 허락을 받을 수 있겠죠?


외로움이 너무나 익숙하고 너무나 당연해서 정확히 무엇인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면서. 외롭지 않다는 감각을 알아야 외로움이 무엇인지 떼어 생각할 수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럴 수 없었다.


나와 진아가 아주 다르게 살아가는 건 그저 아주 다른 선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통념에 따라가지 않은 진아의 선택만 옳은 것이 아니듯, 내가 의심 없이 결혼과 출산을 선택한 것은 미숙하고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통념에 의문을 품지 않고 기혼 여성이 된 것을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었다. 이제는 진아의 삶을 흠모하고 싶지 않았다.


힘들 줄 알았는데, 역시나 힘들었다. 꼭 참여하고 싶었던 기획이어서 기쁘게 응했지만, 청탁 전화를 받은 그 순간뿐이었다. 왜 힘들었냐면, 책으로 읽은 페미니즘과 SNS에서 드러나는 페미니즘, 내가 아는 페미니즘과 희망하는 페미니즘, 내 집에서의 페미니즘—딸들에게 설명하는 페미니즘과 남편을 설득하는 페미니즘, 내가 쓰고 싶었던 소설 속의 페미니즘과 결국 내 소설 속에 갇혀버리고 만 페미니즘이 모두 다 다른 언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실제의 내가 실천하는 페미니즘이 그 모든 페미니즘을 따라잡을 수 없어 나는 너무 자주 곤란해지곤 했다. 반성하겠다.


소설을 먼저 읽어준 S가 그런 말을 했다. ‘여적여·여적남 만들지 말고, 처연한·청승맞은 페미니즘도 지양합시다!’ 무엇보다도 나 역시 바랐던 바! 그러나 망치로 남자 머리를 깨부수는 여자가 등장하는 십 년 전에 쓴 소설이 더 페미니즘적인 소설이었나 싶고. 그래도 아무도 죽지 않는 이번 소설이 열 배는 더 쓰기 어려웠다는 걸 아무도 알 턱이 없어 이렇게 적어둔다.


아직까지 포기하지 않는 긍정적 마인드의 소유자이거나 아니면 사태 파악조차 제대로 안 되는 모양인 신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경찰이나 관공서에 도움을 청하거나 하다못해 구멍가게 같은 거라도 찾아서 숨겨달라 하지 않을 건가? 아마도 그는 줄곧 그런 세계에서 살아왔을 터였다. 자신이 서푼짜리 힘을 쥐었거나, 최소한 힘을 쥔 누군가에게 등을 비빌 수라도 있는 세계에서. 자신의 상식이 작용하지 않는 세계의 틈으로 내던져진 적 없는 사람이 보이게 마련인, 낙관적이고 나이브한 반응이었다.


그러니까 진실은 이거야. 너는 쓸데없는 의무에서 벗어나도 돼. 고감도 안테나를 세우는 데 전력을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화성의 돌이라도 하나 치우는 게 나아.


“나는 온 우주에서 오직 너만을 걱정한단다. 얘야. 모든 별들은 어머니이고 우리는 춥지 않단다.” 아이는 태어날 것이다. 나 말고 이모가 둘이나 더 있으니 걱정할 것이 없다. 만삭의 배를 어루만지며 이런 말을 읊조리자 데이모스가 내 성별이 여자냐고 되묻는다. 라이카가 윙크하듯 귀를 쫑긋 세운다. 소리에 화답하듯 배가 한 번 꿈틀거렸다.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막상 문학과 멀어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동화에서 소설로 차근히 넘어갔다. 분명 그랬다. 그저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그것은 남성이 쓴 글의 많은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성이 쓴 글의 많은 부분을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문학을, 그러니까 문학적이라는 인정을 독식한 남성의 글을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노력을 기울이며 열등감을 극복하려 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항구한 인류의 가치를 향유하는 대신 주변적이고 사소한 글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머무는 데 그럭저럭 만족했다.





[작품 목록]

조남주 〈현남 오빠에게〉

최은영 〈당신의 평화

김이설 〈경년(更年)

최정화 〈모든 것을 제자리에

손보미 〈이방인

구병모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김성중 〈화성의 아이

발문_이민경 〈여성의 이야기에 오래 머무른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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