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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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노진준 『믿음을 의심하다』

| Mashimaro | 2022. 1. 25. 20:05

 

 

 

 

 

믿음이라니... 정말 나에게는 참 연이 깊은 단어이기도 하다. 한때는 믿음을 자랑하던 때도 있었고, 또 한때는 근원적인 믿음이 흔들린 적도 있었던 나이다. 내 달란트가 무대뽀적인 믿음이라고 이야기했던 시기도 있었으니, 그만큼 나는 믿음에 대해 참 관심도 많고 경험도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굉장히 타성에 젖은 신앙생활을 하고있지 않나... 싶은 이시기에 오랜만에 이런 신앙서적을 집어들고 읽게 되었다. 

 

사실 요즘엔 신앙서적을 읽어도 큰 감흥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뭔가 끄덕여지고 도전을 주기도 하지만,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깨달음 혹은 묵상이 가능한 책은 요즘 많이 못읽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건 비단 책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의 변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너무 드라이하게 독서를 한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니까. 그런데 이 책은 참 오랜만에 집중해서 읽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워낙에 관심이 많은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글을 통해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설명하는 저자의 글투가 많은 납득과 끄덕임을 동반하게 했다. 아마도 나에게 맞는 글이라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사실 이 책은 믿음에 대해서 혹은 신앙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알고있거나, 혹은 지식없이 열정만 가득한 크리스천이 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또는 설교를 들으면서 굉장히 맹목적일 수 있고 또 애매할 수도 있는 부분이 참 많다. 그러한 면에서 저자는 최대한 친절하게 설명해주고자 하는 의지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또 매번 성경속에서 접하는 표현이나 구절이어서 너무나 익숙한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이 어떠한지.. 과연 이 말씀을 왜 하신건지.. 이러한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궁금증에 어느정도 답해줄 수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많이 어렵지도 않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지한 질문에 진지하게 답해주는 책이랄까... 특히 나처럼, 신앙서적에 대해 독태기를 겪고있는 크리스천이라면 한번 권해보고 싶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과연 이 말을 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이 그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도 않고, 구원받지 않는 것이 그렇게 두렵지도 않은 현대인들에게 ‘거의 공짜로 생명보험을 들 듯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갖도록 한 기발한 전도 방법이었을까요? 만일 그렇다면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은 이제는 아주 익숙해져서 거의 통하지 않는 허접한 상술이나 보이스 피싱 안내 멘트처럼 되고 말았는지도 모릅니다.

 

믿음이 마치 또 다른 행위처럼, 즉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자신의 행위로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믿음이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한 구원을 신뢰함이 아니라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될 때 자신의 행위가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믿음으로’가 강조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 일에 동의할 수 있는 지식이나 확신이 아닙니다.

 

오늘날 ‘오직 믿음’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는 어쩌면 종교개혁 시대와는 반대로 교회가 교회의 횡포와 지도자들의 부패를 조장하거나 합리화하기 위해 ‘오직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믿음이라는 말이 종교적 행위나 태도를 가리킬 때 이런 현상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구원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믿음으로 세습도 용납해 주어야 하고, 믿음으로 교회 지도자들의 무례함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교회의 요구에 순응하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오늘날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 종교개혁 당시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교회에서 통용되고 있다 싶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믿는 것뿐만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달리 표현하면, 믿음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이미 살펴본 대로, 지적인 동의가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적인 동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의미로) 신뢰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통해 구원이 단번에 임한다 할지라도, 구원받은 성도로 세상을 살아 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는 한 신뢰를 흔드는 시련과 불안은 불가피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아버지의 외침은 믿지 않는 사람의 외침이 아닙니다. 믿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의 부르짖음입니다. “분명히 믿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하지요?”라는 말에서 ‘분명히’라는 표현은 거짓이나 위선이 아닙니다.

 

믿음의 고백은 단번에 일어난 사건일지라도, 그것은 믿음의 여정의 시작일 뿐입니다. 가장 확실한 시작이고 결과가 매우 분명한 시작이라 할지라도 믿음은 시작입니다. 믿음이 끝이라고 말하면 자칫 믿기 시작한 순간부터 주님이 부르실 순간까지의 시간이 의미 없는 공백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야기나 경구 모음집 혹은 윤리적 사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 구절의 의미는 항상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종종 힘이 된다 싶은 성경 구절을 문맥에서 떼어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면 원래의 의미를 상실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욥기 8장 7절일 겁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참 용기가 되는 구절이라서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욥의 친구 빌닷이 응징신학적 배경에서 했던 말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제가 이 고백을 담대하게 할 수 있고 이 고백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나의 원함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확증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중에 믿음이 자랐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성숙해졌다고 말할 때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관계와 지식이 성숙해졌다는 의미이지, 믿음이 성숙해졌다는 의미는 아닐 겁니다. 그렇지만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기에 우리의 경험과 지식은 자라 가야 합니다. 믿음이 순간적이고 단회적으로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 믿음으로 살아 내야 하는 삶의 여정에서 지식과 경험, 관계의 성숙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기에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존재하는 의심의 정체는 하나님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라는 자기 고백의 진실성을 못 믿는 것입니다. 자꾸 흔들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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