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태기가 오거나 고민하지 않고 책을 읽고싶을때 늘 아무튼 시리즈가 날 도와주는 것 같다. 아무튼 시리즈가 워낙에 많은 종류가 있는 만큼, '외국어'라는 테마는 우선순위에서 꽤나 밀려나 있던 것이 사실인데, 요즘 진지하게 영어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지라 급 마음이 동해 읽게되었다. 사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런 주제를 가져온 사람이라면 분명 외국어를 좋아하는 사람일텐데..라는 걱정을 가지고 읽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나는 외국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잘하고 싶지만... 역시나 저자는 외국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저자 역시 외국어에 좌절하거나 포기한 이야기들을 나누어주는 바람에 금새 책 속에 빠져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 저자는 외국어에 관심이 많은 만큼 다양한 외국어 배우기를 시도했던 것 같다. 심지어 그녀의 전공은 프랑스어. 물론 그렇다고해서 프랑스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나역시 일문과로 대학에 입학해서 꽤나 험난한 시간을 보냈던지라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기도 했고, 꽤 많은 포인트에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저자가 많은 외국어 배우기를 시도했던 만큼, 챕터별로 다양한 외국어에 대한 에피소드를 소개했는데, 꽤 신선한 느낌이었다. 모든게 유창한 사람이 쓴 글이 아닌, 그저 외국어를 잘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사람의 글이라서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언어에 맞추어서 그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꽤 좋았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아마 독일어파트가 아니었나 싶다. 언어에서부터 그들의 정확한 성격이 드러난다는 점. 꽤 흥미로웠다. 그리고 스페인어를 통해서 그들에게 받았던 친절했던 기억들을 떠올리고, 또 일본어를 통해서 하루키의 문학세계를 이야기하는 것들이 다 좋았던 것 같다. 역시 언어는 많은 것들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나라의 성격들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조금 다른이야기 일수도 있지만, 책 속에서 꽤나 인상적이었던 것이 하루키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무래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매력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늘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해보고자 하는 고민이 있는데, 저자가 이 책에서 이야기한 하루키에 대한 이미지가 나에게 있어선 가장 공감되는 표현이었던 것 같다. 이례적으로 매우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다는.
어쨌든, 어쩌면 방대할 수도 있는 외국어에 대한 이야기를 담백하고 즐겁게 풀었냈다는 점이 참 좋았던 것 같다. 어쩌다 외국어 관련 책을 읽은 참에, 진지하게 다시 영어와도 마주해봐야겠다. 더이상 도망치지 말고.
외국어의 평화를 잠식하는 것은 대체로 동사라는 막강한 빌런의 공이 크다. 마치 공부를 잘해도 수학을 못하면 크게 힘(?)을 쓰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를 잘한다는 것은 동사를 잘 구사한다는 뜻과 많이 다르지 않다.
모든 언어는 그 언어가 그 언어일 수밖에 없는 개성과 그 개성이라는 예쁜 말 뒤로 어마어마한 협곡이 있다. 협곡을 건넌 사람과 건너기 전에 멈춘 사람, 협곡에 빠진 사람으로 나눈다면 나는 대체로 협곡이 보일 즈음에 멈췄거나, 빠졌다가 겨우 나와서 가던 길 안 가고 반대로 돌아왔던 것 같다
『수학의 정석』 기초에서 집합 부분만 까매졌던 추억처럼, 앞부분만 흔적이 남아서 헌책방에서도 환영받을 만한 기초 외국어 책이 집에 잔뜩 쌓여 있건만, 이 미련의 정체를, 잘은 모르겠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늘 시간이 별로 많지 않다.
물론, 전공을 말하면 사람들이 “나 지금 무슨 생각하게?” 하고 맞춰보라고 한다는 심리학과 졸업생이나 영원히 노트북 추천 혹은 수리 요청에 시달린다는 컴퓨터공학과 졸업생보다야 낫겠지만, “불어를 잘하시겠네요!”라는 영혼 없는 기대감을 접하고 나면 전공자라고 불어를 잘하는 게 아니라는 경험적인 팩트와 그런 얘기 하시는 당신은 전공을 잘하시는지 묻고 싶은 호승심이 묘하게 시너지를 일으킨다.
인과관계가 종종 혼동되지만, 열심히 안 했고, 그러다 보니 잘 못해서, 그나마도 다 까먹어서 아쉬울 뿐이지, 나는 이 전공을 후회한 적이 없다. 대체적으로 한심하고 일반적으로 잘 안 풀리는 이 삶의 이유는 나 때문이지, 나의 전공 때문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하루아침에 이재민이 된 사람들이 보여준 절제와 인내는 정말 놀라웠다. 유수의 매체에서 “인류 정신의 진화”라고 극찬을 했지만, 극도의 불안 상황 속에서도 새치기 한 번 없고, 버려진 쓰레기 한 조각이 없고, 심지어 우는 아이의 칭얼거림조차 없는 비현실적인 정경에 나는 어쩐지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오는 불가항력의 파괴와 절멸을 무의식적으로 내면화한 것 같은, 오래전에 예정된 운명의 수순을 받아들이는 과정처럼 보이는 처연한 감정들이 너무 슬펐다. 압도적인 재앙에 극도로 차분하게 대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울컥 슬픔이 밀려왔다.
언제고 땅바닥이 흔들려 주변을 둘러싼 모든 것을 삼킬지도 모른다는 학습을 평생에 걸쳐 반복한다는 것은, 일본이라는 땅에 사는 사람들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어딘지 늘 의심이 많고 겁도 많고 조심성이 많은 특유의 기질 밑바탕에는, 수백 년 누적된 죽음의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체념이라는 정당화, 순응이라는 편리함, 대의 혹은 대세라는 이데올로기에 유독 일본 사람들이 쉽게 투항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혼자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라는 오래된 확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일본 문단에서는 외면받는 하루키지만, 파리나 베를린 혹은 포르투갈의 크고 작은 서점의 ‘일본 문학’ 섹션은 하루키 섹션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서점 순례객들은 안다. 누가 뭐라든 처음부터 마이 웨이였던 사람, 묘비명에 “적어도 걷지는 않았다”라고 쓰고 싶다는 진짜 러너인 이 작가를 존경한다. 그의 작품을 모두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다. 갑자기 히카루 겐지 같은 마성남이 되어버리는 소설 속의 바람둥이 맹물남을 애정한다는 뜻도 아니다. 만날 여자랑 같이 자고 나서 깨달음을 얻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튼, 계속 쓰고, 계속 뛰며, 계속 싸워나가는 그 ‘계속해보겠습니다’ 정신을 사랑한다. 체념하지 말고, 순응하지 말고, 투항하지 말고, 다른 그 어떤 존재에게라도 나를 방치하지 말라는, 어찌 보면 잔소리 같은 메시지가 아직은 질리지 않는다. 그렇게 ‘언제 적’ 하루키는 ‘그래도’ 하루키가 된다.
잠시 중국어를 가르쳐주던 화교 후배가 <와호장룡>이 대륙 사람들에게 무시받았던 중요한 이유 하나를 알려주었다. “언니, <와호장룡>은 중국어가 너무 엉망이에요. 중국어 제대로 하는 배우가 장쯔이 하나였어요.”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말풍선이 떠 있었다면 물음표가 열 개쯤 둥실둥실 떠다녔을 것이다. 중국 영화에서 중국어가 엉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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