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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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 Mashimaro | 2017. 10. 17. 15:44






함께읽기가 아니라면 또 절대 읽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책을 읽게되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워낙에 유명한 작가이지만 솔직히말해 지금까지 한번도 그녀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다. 그만큼 난 문학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지 못하고 또 읽은 책이 그리 많지도 않다. 그런 입장에서 이 '자기만의 방'이라는 작품을 읽는다는건 솔직히 꽤 어려운 미션이었다. 이 작품은 에세이에 가까운데, 사실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캠브리지대학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작품이다. 그러다보니 꽤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이 등장하는데, 솔직히말해 주석을 읽으면서 간신히 따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나마 자주 등장하는 샬롯 브론테나 제인 오스틴의 작품 등은 그래도 좀 읽었었기에 다행이기도 했다. 


아마도 이 자기만의 방을 읽으면 버지니아 울프가 페미니스트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페미니스트로 정의할 수 있을지 그렇지 않을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강연을 했던 1920년대 말 그 당시의 여성들의 상황과 그 상황이 있을 수 있게 해주었던 여성들(특히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그녀들의 상황을 생각보다 심플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성과 픽션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한 울프가 이야기한 핵심 중 하나는 '연간 500파운드 정도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을 갖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굉장히 극단적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난 꽤 이 주장에 공감했다. 성역할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대립되어있던 시기를 지나 이제 막 여성이 선거권을 갖게 되었던 시기이다. 경제적인 부분은 심리적, 정서적인 부분으로 이어진다. 또한 픽션이라는 작품은 정서적인 부분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경제원리가 100% 이러한 것들을 대표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시 울프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과 영향력을 갖기에 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재미있는 부분은 여성성과 정치성 등을 작품에서 드러내면 안된다는 부분이었다. 울프가 샬롯 브론테를 비판적으로 평가한 부분이 이것이었는데, '제인에어'의 한 부분을 발췌하면서 샬롯 브론테가 작품에서 본인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것. 그리고 당시 여성들이 본인이 여성임을 숨기고 남성필명을 사용했다는 부분이나, 일부러 남성성을 드러내는 것에도 비판적인 어조로 이야기한 것 같다. 아무래도 주제가 '픽션'이기 때문에 더 그러한 것 같다. 요즘에야 오히려 여성성 혹은 정치색을 드러내는 픽션들도 호응을 받을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당시에는 이러한 성향들이 순수한 풍자나 작품의 색깔로 그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이 울프언니는 굉장한 비평가라는 생각이 든다. 은근 신랄하게 이야기하면서도 풍자적인 요소도 들어있다.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이야기꾼임에는 확실하지 않나라는 생각도 든다. 개인적으로 옥스브리지라는 학교이름에 피식 웃기도 했다. 짐작이지만 아마도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합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엄청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처음엔 사실 거의 억지로 읽다시피 했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꽤 몰입도가 생기는 작품인 것 같다. 그리고 결론은, 이 책은 대충읽어서 될 책이 아니다. 언급된 문학작품들과 당시의 시대적상황을 좀 더 공부한 이후에 다시 읽어본다면 그 진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석간신문을 넘기면서, 이 모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분노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분노는 권력을 가진 자를 따라다니는 친숙한 영혼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지요. 예를 들어 부유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빼앗아 가지 않을까 의심하기 때문에 화를 냅니다. 교수들, 더 정확히 부르자면 가장들은 부분적으로는 그런 이유로 화를 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잘 알 수 없는 다른 이유로 화를 내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전혀 '분노'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그들은 대개 개인적인 관계에서는 헌신적이고 모범적이며 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교수들이 여성의 열등성을 다소 지나치게 강조할 때는, 여성의 열등함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에 관심이 있는 것일 것입니다. 



나는 이중에서 어떤 직업이 사회에 더 필요하며 더 고귀한 것인지 말하는 것은 100년 전에도 분명 어려웠을 것이며, 그때보다도 지금은 더 어렵다는 생각을 했지요. 석탄 인부가 보모보다 더 나은가. 아이 여덟을 키운 하녀가 10만 파운드를 번 변호사보다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대답할 수 없으니까요. 하녀와 변호사의 상대적인 가치가 수십 년이 흐르면서 오르락내리락할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지금 이 시점에서 그들의 가치를 측정할 어떠한 잣대도 없습니다. 그 교수에게 여성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할 이런저런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한 재능의 가치는 어떤 시점에서 말할 수 있다 해도 그러한 가치는 변할 것입니다. 추측하건대 100년이 지나면 그 가치는 완전히 변할 것입니다. 더구나 수백 년이 지나면 여성은 보호받는 성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오만과 편견』이 중요하다면, 『미들마치』와 『빌레트』와 『워더링 하이츠』가 중요하다면, 시골 별장에서 책에 묻혀 살거나 아첨하는 이들 사이에 갇혀 지내는 고독한 귀부인뿐만 아니라 일반 여성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한 시간의 강연에서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한 선구자들이 없었다면, 제인 오스틴과 브론테 자매와 조지 엘리엇은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빌레트』, 『엠마』, 『워더링 하이츠』, 『미들마치』, 이런 모든 훌륭한 소설들이 점잖은 교구 목사관 외에는 다른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한 여성이 썼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런 점잖은 교구 목사관의 거실에서 이런 소설을 썼다는 사실을, 너무나 가난해서 『워더링 하이츠』나 『제인 에어』를 쓸 종이를 한 번에 한 묶음밖에 살 여유가 없는 여성들이 썼다는 사실을 감안해야만 합니다.



어쨌든 여성으로서 의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치명적이라는 말은 단순히 수사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의식적인 편향을 가지고 쓴 글은 소멸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글은 비옥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글은 하루 이틀 동안은 훌륭하고 효과적이며, 강인하고 능수능란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해 질 녘이면 시들어버리고 맙니다. 그런 글은 다른 이의 마음에서 자랄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협동이 일어나야만 예술 창작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 반대되는 것 사이의 혼사가 잘 맺어져야만 합니다. 



나는 마음이나 성격의 어떤 재능을 설탕이나 버터처럼 무게로 잴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등급별로 분류하고, 그에 따라 정해진 모자를 씌우고, 이름에 칭호를 붙이는 데 능숙한 케임브리지 대학도 재능을 측정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내 앞에는 물질적인 장애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글쓰기는 평판도 좋고, 무해한 직업이었으니까요. 글을 끼적인다고 해서 가족의 평화가 깨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족의 지갑에 든 돈을 필요로 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16펜스에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을 충분히 쓰고도 남을 만큼의 종이를 살 수 있으니까요. 글을 쓰는 사람은 피아노나 모델, 파리, 비엔나, 베를린, 남자, 여자 선생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싼 종이값은 두말할 것 없이 여성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 작가로 먼저 성공했던 이유입니다. _ 부록 / 여성의 전문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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