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은 작가(라고 하니 조금은 어색하기는 한데..)는 처음 가수로 데뷔했을 당시부터 계속 보고 음악을 들어왔던 가수 중 한 명이다. 워낙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들 및 프로듀서들과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 심지어 나와 비슷한 또래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생시절에 데뷔한 모습도 참 부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또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멋지게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보니, 또다른 부러움이 생기기도 한다. 가수를 그만두고 훌쩍 미국으로 떠나서 변호사가 되었을때에도 한창 이슈가 되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국제기구라는 다른 환경을 더 경험하고 엄마도 된 상황에서 그 이야기를 공유해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이보다 더 좋은 자기계발서가 있을까 싶었다. 사실 자기계발서를 매우 잘 읽는 타입은 아닌데, 이렇게 경험을 기반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명확히 풀어주면, 참 알아듣기도 쉽고 동기부여도 잘 된다. 또 같은 또래의 여성 전문직으로 일하고 있다는 어느정도의 공통분모도 있으니, 참고하고 싶은 생각들도 많고 또 이미 같은 생각을 하고있는 포인트들도 참 많았던 것 같다. 이럴때마다 내 생각이 공감받고 검증받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러한 이야기들로 꽉꽉 채워져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삶의 이야기 자체도 참 인상적이만, 책 속에서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워낙에 에피소드를 방송에서도 몇 번 들은 것 같아서 조금 익숙하기도 하고 여전히 존경스러운 부분이 있었는데, 어머니의 이야기는 정말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그러한 삶의 표본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녀도 단단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거기에 덤을 얹어본다면 동생바보라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은 언니의 끔찍한 사랑도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또래의 멋진 여성으로서 그녀가 더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로 알려졌으나 출처가 불분명한 이 명언을 떠올려본다. “Be yourself. Everyone else is already taken.(너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은 이미 존재한다.)” 다른 사람이 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다는 말이다. 변호사라고 해서 일부러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를 풍기려고 할 이유도, 센 언니일 이유도, 모노톤의 의상을 입어야 할 이유도 없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직업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에 나 자신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만의 옷을 입을 때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고 최대의 결과물이 나온다. 가장 나다운 것이 가장 강렬한 힘이다.
‘워라밸work-life balance’ 개념에 대해 그녀는 색다른 시각을 제시했다. 균형을 이루고자 하는 일과 삶, 웰빙과 생산성을 서로 대치되는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에 서서 함께 다뤄져야 할 가치로 본 것이다. 성공에 대해 재정의하고 사람들의 건강 등을 다루며 다양한 일을 진행하는 ‘스라이브 글로벌’의 핵심에는 자신을 돌보는 셀프케어가 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바쁜 삶이 만족스럽거나 뿌듯하지 않고 무겁게만 느껴질까?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고 하는데, 어째서 ‘나’라는 바쁜 꿀벌은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시간이 늘 함께하는 것일까. 엄마가 걸어온 인생의 마디마디에는 힘듦 속에도 온화함과 자유로움이 있었다. 이 자유는 욕심으로부터의 자유다. 삶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부지런하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이해한다. 엄마의 마음에는 어디에도 예속되지 않는 공간이 있다. 그렇기에 늘 마음이 새로운 길을 향해 열려 있고, 쓸데없는 고민으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욕심이 들어갈 공간을 행동으로 채웠다. 어쩌면 외부 상황이 힘겨웠기 때문에 유일하게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마음의 자유를 그토록 갈구하셨는지도 모른다.
우리 속담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겸손의 미덕을 전하는 속담이지만, 내가 고개를 숙인다면 다른 의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겸손이라기보다는 잘 해내지 못할 것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이기적인 마음. 창피함을 피하고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리지 않겠다는 안일한 마음. 뭔가를 안다며 머리를 바짝 들고 있을 자격이 있나 하는 의구심 때문에 고개를 숙이는 부족한 마음. 자격에는 학위, 자격증, 스펙 같은 외적 장치와 더불어 스스로 무엇을 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내적인 자기 확신도 포함된다. 자신감이 있다가도 가끔은 ‘내가 과연 이걸 해낼 수 있을까? 자격이 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경험을 쌓고 준비를 많이 한다 해도 남이 나에게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기 전까지는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는 사람이었나 싶어 때론 놀라기도 한다.
굳이 따지자면 태어나서 전문적으로 따놓은 자격증은 운전면허와 변호사 자격증뿐이다. 자격증이 있는 변호사 업무도 자격이 부족할까 봐 불안을 느끼기는 매한가지이고, 경력 20년이 넘는 운전 역시 사고와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음반을 내고 공연과 방송을 하고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여러 패널에 전문가 연사로 참석한다. 이제는 한 아이의 삶을 책임지는 엄마도 되었다. 누구도 내게 이런 일을 할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이 꿈을 꿔도 될까, 이 사업을 시작해도 될까, 승진에 도전해볼 자격이 되나, 이 포지션에 지원할 능력이 있나, 끊임없이 나를 의심하며 포기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인사 담당 부서가 내세운 자격에 부합되지 않아 스물일곱 군데에서 탈락했을 수도 있고, 나보다 더 적임자가 있어 안 됐을 수도 있다.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러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조금씩 내 길을 구체화했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인생은 여러 문을 두드렸다가 가까스로 열린 문에 비집고 들어가서 악착같이 내 길을 파면서 나아가는 것이니까. 그렇게 쌓은 경험이 다음 도전에서 지금보다 한 단계 높은 자신감을 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수확은 없다.
시인 마야 안젤루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모든 곳에 속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알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내 삶에 적용하기 위해 간절히 노력하는 중이다. 뉴욕이 가진 수많은 수식어와 이미지 사이에 사람들의 진짜 일상이 존재하듯, 내 이력서에 나열된 어울리지 않는 요소 사이사이에 나의 진짜 모습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카테고리에 속하려고 애쓰기보다는 그 모호한 경계에서 지금의 나로 수많은 내일을 향해 건너가는 것이 가장 나다운 삶이라고 믿는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뉴욕에서 일하며 정착한 지금, 재미 한인이나 유학생이 아닌, 뉴욕에 사는 한국인으로서 소속에 대한 애매함은 계속될 것 같다. 가끔은 경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한다.
“변호사이지만 가수 생활을 그만두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뉴스에서 본 것 같아요. 음악은 계속하시는 건가요? 변호사인데 지금 소속은 어디인가요?” 우리 사회는 소속이나 타이틀에 민감하다. 이력서의 공백을 오점이라고 치부하는 직장 문화 때문인지 한 타이틀에서 바로 다른 타이틀로 오버랩되는 것에 익숙하고 특정 카테고리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커리어가 열 번도 바뀔 수 있는 요즘 시대에 말이다.
나 역시 소속감이 주는 안정감이 좋다. 하지만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어도 내가 있어야 할 곳인지 확신이 들지 않아 또 다른 질문을 하게 된다. ‘왜 한곳에 소속되어야 하는 걸까?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삶과 정체성, 그리고 커리어를 가질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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