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유발 하라리의 글을 많이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그래서 《사피엔스》 이후에 그의 책이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더 읽지 않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놓고 왜 구입은 해두었을까?ㅎㅎ 어쨌든 좋은 기회에 함께읽기에 참여하게 되었고, 덕분에 이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사피엔스》와 다른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매주 두챕터씩 읽으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정도?
사실 《사피엔스》를 읽으면서도 약간 삐딱한 시선으로 책을 읽긴 했지만, 그래도 이 책 《호모 데우스》보다는 사피엔스가 더 재미있게 잘 읽혔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내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래'에 대해서도 관심이 꽤 많은지라 《호모 데우스》에서도 꽤나 관심분야가 많이 등장하긴 했다. 물론 역시나 이번에도 깨달은 점은, 나는 정말 유발 하라리의 문체와 잘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의 도발적인 글투는 주기적으로 나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물론 그의 문제제기와 의견들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고, 그리고 심지어 참신하게 생각을 잘 정리했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도 많았다. 하지만 너무나 자극적인 글투와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켜서 이야기하는 방식들은 계속해서 거슬렸던 것 같다. 결국 우리의 '인간성'에 대해서 자꾸 해체해 보게되고, 점점 디프레스되는 느낌이 있다고나 할까? 거기다가 이번 책에서는 전작보다 더 신랄하게 종교를 '까기'시작한다. 전작에서도 꽤나 종교를 디스하는 느낌이 있지만, 이번편에서는 아주 작정을 하고 까는 느낌이랄까? 물론 인정하는 부분도 있지만, 이런 면만 있는 것은 아닐텐데.. 하는, 긍정적인 요소들에 대해서는 의도적 혹은 의도치않게 배제시키고 있는 느낌조차도 들었다.
어쨌든, 이번 책은 전작보다 조금 더 '인간'에 초점을 맞춘 것 같았다. 그래서 파트도 사피엔스의 과거, 인본주의 세계, 그리고 이를 통한 현시점에서 바라보는 미래에 대해 나누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는 아마도 이 책을 관통하는 컨셉으로서 첫 챕터를 통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 듯 하다.
성공은 야망을 낳는다. 인류는 지금까지 이룩한 성취를 딛고 더 과감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중략) 사람들을 극도의 비참함에서 구한 다음에 할 일은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짐승 수준의 생존투쟁에서 인류를 건져올린 다음 할 일은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호모 사피엔스'를 '호모 데우스'로 바꾸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사피엔스》, 《호모 데우스》라는 제목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인류를 신으로 업그레이드 한다. 직접 신이되려고 하는 인간. 이러한 의미를 담아서 '호모 데우스'라고 표현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작명센스 하나는 진짜 대단한 것 같다. 어쨌든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그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사피엔스》, 《총, 균, 쇠》, 《이기적 유전자》 등등의 책들이 혼재되어있는 느낌마저 받는다. 미래 파트를 읽다보면 최근에 읽은 《컨버전스 2030》같은 책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몇 년 더 최근작이라고 《컨버전스 2030》쪽에서 더 최신정보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책에 자꾸 레퍼런스로 등장하는 덕분에 이제는 《특이점이 온다》에도 손을 대고 읽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렇게 또 유발 하라리의 책 한 권을 끝냈다. 솔직히 전작 《사피엔스》보다는 살짝 헤매고 있는 느낌이 강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또 이야기를 엮어가는 그를 인기작가로서 인정할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부디 다른 작품들은 웃으면서 읽을 수 있게 되기를...
그런데 과학은 단지 미래를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모든 분야의 학자들은 우리의 지평을 넓히고 그럼으로써 우리 앞에 새로운 미지의 미래를 열고자 한다. 역사 분야에서는 특히 그렇다. 이따금씩 역사학자들이 예언을 시도하기도 하지만(성공 사례로 꼽을 만한 것은 딱히 없다), 그럼에도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다른 동물들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인간은 오래전에 신이 되었다. 우리가 이 사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 싫어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다지 공정한 신도 자비로운 신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돼지에게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화가 아니다. 그것은 ‘포유류화’이다. 감정은 인간만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은 모든 포유류가 공유하는 성질이다(더 나아가 모든 조류와 몇몇 파충류, 심지어 어류도 감정을 느낀다).
이렇게 상호주관적인 실재들을 창조하는 능력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에게서 분리할 뿐 아니라, 인문학을 생명과학에서 분리한다.
이 모든 과정은 약 7만 년 전 인지혁명과 함께 사피엔스들이 자신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작되었다.
겨우 고무도장 한 개로 무장한 소사 멘데스는 홀로코스트에서 개인으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구조작전을 펼쳤다.
역사에는 단 하나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수천 개의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그중 하나를 선택할 때 우리는 나머지 내러티브들을 침묵시키는 선택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한편 과학은 다른 무엇보다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에게 새 지식을 찾아나설 매우 타당한 이유가 생겼고, 이것은 진보를 향해 가는 과학의 길을 열었다.
컴퓨터 알고리즘이 2033년까지 고고학자를 내쫓을 확률은 단 0.7퍼센트이다. 왜냐하면 고고학자라는 직업은 매우 정교한 유형의 패턴을 인식해야 하고 수익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이나 정부가 향후 20년 내에 고고학을 자동화하기 위해 투자할 확률은 거의 없다.
동안의 역사에서도 부자들은 많은 사회적ㆍ정치적 이점을 누렸지만, 그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가르는 생물학적 차이는 결코 크지 않았다. 중세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맥에 우월한 푸른 피가 흐른다고 주장했고, 인도의 브라만 계급도 자신들이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은 순전히 허구였다. 하지만 미래에 우리는 업그레이드된 상위 계급과 사회의 나머지 구성원들 사이에 육체적ㆍ인지적 능력 차이가 실제로 벌어지는 현장을 보게 될 것이다.
18세기에 인본주의는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신을 밀어냈다. 21세기에 데이터교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을 밀어낼 것이다.
하라리는 생물학과 역사학을 융합하는 흥미로운 시도를 하고 있지만 과학자가 아니라 역사학자다. 유토피아일지 디스토피아일지 그 사이의 어떤 지점일지는 모르지만, 그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사피엔스’라는 사실은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중요하다. (옮긴이의 말 _ 김명주)
'♡공감'과 '댓글'이 큰 힘이 됩니다.
'Books > Book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J. R. R. 톨킨 『반지의 제왕 1. 반지 원정대』 (0) | 2021.07.14 |
---|---|
마이크 브라운 『나는 어쩌다 명왕성을 죽였나』 (0) | 2021.07.07 |
코리 닥터로우 『홈랜드』 (0) | 2021.07.05 |
김진명 『고구려 7. 동백과 한란』 (0) | 2021.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