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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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김민섭, 김혼비, 남궁인, 문보영, 오은, 이은정, 정지우 『내가 너의 첫 문장이었을 때』

| Mashimaro | 2021. 2. 28. 18:41

 

 

 

 

 

이 책은 7명의 작가들이 쓴 에세이 모음집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 책의 재료가 되었던 글들은 메일로 글을 배달해주는 에세이 새벽 배송 서비스인 '책장 위 고양이'를 통해서 배달되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사실 이 서비스가 시작된 이후에 알게되어 매우 궁금했는데 이렇게 책으로 나와주어서(심지어 리디셀렉트에 올라와주니) 감사하게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서비스자체에 대한 궁금증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꽤 많이 참여했다는 것도 이 책을 읽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버릴게 없을 정도로 참 재미있는 글들이 많았다. 특히나 에세이라는 장르때문인지, 아니면 메일로 배달된다는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매우 생생하면서도 창의적인 내용이 참 재미있었다. 원래 김혼비작가는 워낙에도 팬이었기에 김혼비 작가의 글을 하나라도 더 읽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무조건 좋았고. 김민섭 작가의 더 많은 이야기들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최고의 발견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남궁인 작가인 것 같은데, 이름은 많이 들어왔지만 실제로 글을 읽은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내가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생각들을 조금씩 깨주는 느낌이랄까? 기발한 발상과 글투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사실 주어진 주제들은 '고양이, 작가, 친구, 방, 나의 진정한 친구 뿌팟퐁커리, 비, 결혼, 커피, 그 쓸데 없는'인데, 매우 일상적이고 특별해보이지 않는 주제들도 참 많았다. 물론 작가들의 열열한 반응을 이끌어 낸 '나의 진정한 친구 뿌팟퐁커리'와 같은 기발한 주제도 있었지만 말이다. 작가들에게는 참 미안한 말이지만, 작가들이 곤란해하고 힘들어했던 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글을 짜내어 아웃풋을 해낸 그 과정과 결과들이 개인적으로 너무 재미있었다. 아무래도 이러한 점 역시도 에세이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 글 배송서비스는 다음시즌도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는데, 이것도 꼭 책으로 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때그때 메일로 받아보는 재미도 있지만, 나같은 독서패턴에서는 한꺼번에 책으로 읽는 즐거움이 또 쏠쏠했기 때문이다. 작가님들껜 죄송하지만 이런 작품집은 자주자주 내주시길.. ^^

 

 

 

사실 ‘작가’라고 불리면서 정제되지 않은 글을 쓸 필요가 있을지 자주 고민한다. 글 한 편에 모든 공력과 카타르시스를 쏟아부어야 간신히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 정도임을 깨우친 지 오래다. 하지만 괜히 키득거리면서 쓴 글이 의외로 좋았던 경험도 몇 번 있다. 또 늘 힘을 주려니 어깨가 무거워져서, 그야말로 소수의 독자만 볼 캐주얼한 글을 쓰고 싶었다. 가볍게 쓰다 보면 왠지 나도 모르게 ‘어, 재미있는데?’ 하는 경험을 다시 하고 싶었다. _ 남궁인 〈기승 고양이 전결〉

 

그러나 친구들에게 단순히 그런 소모적인 도움만을 원하는 것은 아니다. 책 한 권을 쓴다는 것은 대개 그 시기 자신의 모든 것을 거기에 집중하고 담아낸다는 의미다. 저마다의 차이는 있겠지만 자신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무엇이다. 그래서 ‘나 책이 나왔어’ 하고 말하는 그 마음은 ‘내 책을 사줘’라기보다는 ‘나를 사줘’라든가 ‘나를 읽어 줘’라는 말로 번역되어야 한다. _ 김민섭 〈나를 읽어 주세요〉

 

그때 나는 친구들에게도 그 논문을 건넸다. 그들에게 들은 말은 “야 축하한다, 근데 이거 내가 읽어서 뭐 알겠냐”였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그것을 라면 받침으로 쓰든 책장 어딘가에 두었다가 잃어버리든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 자체로 내가 연구자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받는 일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민섭아, 논문 정말 잘 읽었어. 사실 나는 읽어도 잘 모르겠지만 잘 쓴 것 같아. 그런데 몇 쪽에 오타가 하나 있었어. 나중에 다시 찍게 된다면 여기를 바로잡아 주면 좋겠어.”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정말로 고마워졌다. 얼마나 고마웠냐면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이고 평생 함께 가고 싶은 친구야’라는 심정이 될 만큼 고마웠다. 그가 나를 친구로 생각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받은 것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보답한다는 훌륭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그 논문이, 그 글쓰기가, 나의 모든 것이었음을 아마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한 편의 글이 아니라 한 사람을 읽는다는 기분으로 그 재미없는 논문을 꾸역꾸역 읽었을 것이다. 그러한 마음은 있는 그대로를 넘어 더욱 큰 감동으로 전달되고 만다. _ 김민섭 〈나를 읽어 주세요〉

 

그리고 드디어 뇌이쉬르마른이 피 흘리는 마음과 고스톱을 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녀와 대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뇌이쉬르마른은 사랑보다 더 큰 감정을 느꼈다. 뇌이쉬르마른은 누군가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존재로부터 풀려나 상호성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동등함이라는 감각이었다. 봐주지 않아도 되는, 동등한 플레이가 가능한 인간이 되는 것. 그것은 친구라는 감정이었다. _ 문보영 〈슬픈 사기꾼〉

 

신식이 택한 단어는 친구가 아니라 ‘벗’이었다. 벗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 단어가 주는 ‘가까움’에 놀라고 나에게 없었던 어떤 ‘사이’가 생기는 느낌에 무작정 설렛다. 틈을 내주지 않는 이,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이를 무장 해제시키는 단어, 벗. 그럼에도 불구하고(but) 나를 감싸 줄 것 같은 단어, 벗. _ 오은 〈벗이라고 부르자〉

 

사람은, 사람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에게 자꾸 기울어진다. 살피는 일은 마침내 보살피는 일이 된다. _ 오은 〈벗이라고 부르자〉

 

이런 얄미운 말을 한 적도 있었다. “내 방이니까 내 방식대로 꾸밀 거야!” 나는 ‘꾸미다’라는 동사를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폭넓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방은 늘 ‘치우다’와 가까워지면서 멀어지고 있다. 방을 치우라는 말을 들으면 방과 치우다는 가까워지지만, 방을 치워 놓으면 그것은 치우다와 멀어진다. 방을 치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동안 깨끗한 상태, 치울 필요가 없는 상태가 이어지다 방은 다시 ‘치우다’와 재회한다. 이 시기가 긴 이유는 내가 치우지 않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제대로 치우지 않기 때문이다. _ 오은 〈정리와 정돈과 정렬과 고립과 고독과 고통과〉

 

비 온 후에 사람들은 산책로 곳곳에 놓인 의자를 그냥 지나친다. 젖어서 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는 그랬다. 사람을 일으켜 세워 걷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젖은 의자에 앉는 사람은 비도 어쩔 수 없는 슬픈 사람이다. _ 문보영 〈비가 오면 의자에 앉을 수 없으니 걸어야 해요〉

 

오늘의 쓸데없음으로 인해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다시 가장 쓸 데 있어 보이는 어느 자리에서 반갑게 만날 수 있을 것이다. _ 김민섭 〈모두의 쓸데없음을 존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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