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도 꽤 오래동안 묵혀두었던 책 중 한 권이다. 그리고 책을 구입했을 당시 이 책에 끌리지 않을 수가 없는 제목에 홀리듯이 구입한 책이기도 하다. 《제국대학의 조센징》이라니... 제목이 자극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개인적으로 더 끌렸던 이유는, 내가 (구)제국대학 출신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구)제국대학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연히 현재 일본의 국립대학이라는 뜻이고, 일본의 수많은 국립대학들 중 제국대학으로 시작한 학교들이 있다. 물론 나는 대학원 박사과정부터 이곳에서 수학하기는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끌릴 수 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어쨌든 나의 개인사야 그렇다치고, 관계없는 다른 이들이 본다고 하더라도 한번씩 눈이 가는 제목일 것이다. 사실 일본과 관련된 컨텐츠 혹은 서적들이 이미 너무 많이 나와있고, 또 친일파 인명사전까지 존재할 정도로, 우리는 식민지과거 혹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참 민감하게 반응할 수 밖에 없고, 또 많은 관심.. 아니 어찌보면 과할정도로 강하게 자극을 받아들일 준비를 늘 하고있는 것 같다. 그러한 배경속에서 이 책은 나에게 있어서 참 관심도 가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한 책 중 하나이다. 텍스트 그대로 본다면 왠지 거부감부터 드는 이러한 이미지 속에서, 과연 우리는 제국대학에서 수학하거나 관계있는 그런 제국대학 출신들을 어떻게 생각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그리고 이건 실제로 매우 중요한 질문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보면 저자가 얼마나 열심히 사례들을 조사하고, 또 얼마나 열심히 밸런스를 지키며 글을 쓰려했는지가 느껴진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는 정말 우리가 전형적으로 알고 있는 친일파같은 사람들도 있으며, 또 그 안에서 격렬하게 투쟁했던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경제적인 환경, 사회 문화적 환경들도 꽤 다양하며, 그들이 사회 속에서 적응해간 형태, 상황, 그리고 선택들 또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사례들을 나름의 주제로 정리할 수 있었던 저자가 굉장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또 이를 통해서 현재의 우리사회가 형성된 과정들을 엿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좋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 이 책이 던지는 질문 중 하나가 그것인데, 과연 우리는 이 제국대학 출신들에 대해서 마냥 비판할 수 있는가. 그리고 또 어떤 제국대학 출신들에 대해서는 마냥 찬양할 수 있는가. 식민지 시절에 갖고 있던 생각으로부터 도중에 생각과 사상, 가치관이 바뀐 사람들도 많으며, 일관되게 지켜온 사람들도 있다. 또 한국전쟁 이후에는 이념상의 문제 남북한의 제도의 차이 등 또 다양한 이유로 수 많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 여러 상황들 가운데서 제국대학을 선택했던 이유들 또한 무수히 다양하다. 그러했을 때 우리가 만약 그때 그 입장이었더라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과연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혹은 찬양하고..하는 일에 자유로울 수 있을까...? 나는 다를 수 있었을까... 혹은 나는 같을 수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십 몇년 전 (구)제국대학을 대표되는 한 일본의 국립대학으로 유학와서, 현재 일본에 자리잡고 살고있는 입장에서.. 특히나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 아닐까 싶다.
지금의 자리에서 총독부의 ‘더러운’ 장학금을 받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다. 더 큰 지식을 구하려는 식민지 청년들의 꿈을 가난이 가로막았을 때, 조선총독부의 장학금은 어쩌면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을지도 모른다. 관비 유학에 대해 비난하기 전에 그들이 관비 유학을 통해 얻은 지식을 어디에 썼고, 어떤 길을 걸어갔는지 세심하게 살펴야만 한다. 그럼에도 비판하려면 다음을 묻고 답할 필요가 있다. 그때 그곳에서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나’는 자신 있게 포기했을 거라고 답하진 못하겠다.
그러나 과학기술 분야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이태규와 리승기가 차례로 모교인 교토제국대학 이학부와 공학부의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태규와 리승기의 제국대학 교수 임용 소식에 식민지 저널리즘은 열광했다. 이태규가 프린스턴대학으로 연수를 떠났다가 돌아오거나 리승기가 ‘합성 1호’ 같은 인조섬유를 발명한 일은 조선인의 자긍심을 높이는 업적으로 곧바로 보도되었다. 과학기술은 과학자의 출신, 즉 민족이나 국적, 계급, 성별보다는 그 업적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영역이다. 퀴리 부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식민지 폴란드 출신의 여성 과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라듐 원소를 발견한 과학적 업적 때문이다. 그렇지만 식민지인들은 그녀가 식민지 출신이라는 사실에 더 크게 반응했다.
식민지 저널리즘은 과학 내용보다 그 성취가 얼마나 ‘세계적 수준’이며 그를 통해 어떤 사회적 성공을 이루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를테면 도쿄제국대학 농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우장춘의 업적은 ‘피튜니아 겹꽃 종의 합성’ 이론의 내용보다는 세계 농학계에 명성을 남기고 ‘조선인 최초’로 ‘동양 최대의 농업시험장’의 ‘최고 기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방점이 찍혔다.
이런 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식민지에서 과학은 스포츠 내셔널리즘과 유사한 기능을 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세계적 과학자는 민족의 울분을 풀어준 스포츠 스타와 비슷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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