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HONG[本]'은 일본어로 '책'이라는 뜻입니다.

Books/Book Review

레지나 브렛 『특별한 날은 언제나 오늘』

| Mashimaro | 2018. 7. 15. 20:39






이 책은 자기계발 서적일까? 혹은 에세이? 칼럼? 책을 읽다보니 이 책의 장르는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책은 칼럼리스트인 저자가 기고했던 글들을 엮어서 만든 책이라고 한다. 서점사이트의 카테고리 상으로는 에세이로 되어있던 것 같다. 내 생각에도 에세이가 맞는 것 같은데, 그 안에서 자기계발 서적의 냄새도 나고, 또 어찌보면 묵상집같은 느낌도 난다. 그만큼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한 이야기를 쓰긴 했지만, 그 경험이라는 범주가 꽤 넓다. 사실 책 소개를 통해서 저자가 미혼모이기도 했고, 또 유방암에 걸려서 암투병도 했다는 정보는 갖고 읽기 시작했지만, 이런 엄청난 에피소드를 가지고 있는 다른 서적들이 이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과 달리, 이 책은 굉장히 폭넓은 에피소드를 등장시킨다. 


일단 저자는 어찌보면 참 평범한 사람이기도 했고, 그리고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등장하는 주변사람들 역시 굉장한 우여곡절과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저자 뿐만이 아닌, 주변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들, 느낄 수 있는 점들이 참 많다는 것이 인상적인 부분이었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주변의 그러한 사람들로 인해 저자가 좋은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저자 뿐만이 아닌, 이 책의 등장하는 그들의 삶을 통해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운다. 물론 세상엔 참 배울만한 삶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많이 곁에 두고 살아온 저자가 부럽다고까지 느꼈다.


한편 이 책은 묵상집 같이 느껴질 정도로 성경구절 혹은 수도원이나 신부님 수녀님들이 많이 등장한다. 난 개신교라서 가톨릭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경의 내용자체가 낯설지가 않아서 그런지 이해하기가 쉬웠고, 또 저자의 묵상을 함께 공유하면서 참 좋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래서인가, 프롤로그에서 이 글들이 무신론자들에게도 많이 읽혔다는 대목이 기억났다. 책을 읽으면서, 종교색이 나름 많이 들어나는 것을 보고, 그래서 프롤로그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구나..도 싶었다. 물론 '신'이라는 표현을 줄굳 이야기를 진행시키지만, 저자가 얼마나 많은 시간 고민하고 싸워가면서 묵상을 해오고 기도를 해왔는지가 전달되어왔다. 원래 목사님이나 신부님으로 부터 듣는 설교보다도 삶을 통해서 경험하고 치열하게 몸부림 친 묵상집이 더 와닿는 법이다. 덕분에 나는 너무 좋았는데, 다른 독자들에게는 어떻게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책을 읽기 전, 책 소개를 보면서 파란만장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각오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밝게 그리고 희망적인 이야기들로 진행되서 읽기가 참 수월했다. 그리고 참 많이 배웠다. 나도 그동안 소홀했던 묵상을 다시 재개해아 할 시기인가부다. 





40파운드가량 살을 빼고 싶다면 튀김 대신에 샐러드를 주문하면 된다.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면 내가 먼저 수화기를 집어 들어야 한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 앉아서 작은 문단부터 채워나가야 한다. 이게 변화의 시작이다. 당신의 다음 단계는 무엇인가? 그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부터 그냥 하라.


요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때로는 돌아오는 답이 '예스'이고 때로는 '노'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요구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답은 항상 '노'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내는 시작점은 바로 요구하는 것이다.


"분노로부터 놓여나고 싶습니까? 당신의 증오하는 대상이나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그 분노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 바라는 것을, 분노의 대상을 위해서도 기원해 줄 수 있다면 당신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들의 건강, 그들의 부귀, 행복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면 당신은 놓여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도가 말뿐이라고 할지라도, 그만두지 마십시오. 어쨌든 계속하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2주 동안 매일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면 어느 순간 그들을 위해 진실로 바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 비탄과 분노와 증오만이 있던 그 자리에 어느새 연민 어린 사랑과 이해가 들어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는 신의 섭리를 늘 이해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기도를 올린다. 속담이 얘기하는 것처럼 전기 작동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어둠 속에서 불을 켜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신을 믿기 위해 신을 이해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신은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성스러움을 인간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위선적인 기도와 허위의 기도도 원하지 않는다. 신이 원하는 것은 바르고 진실하고 참된 관계일 뿐이다. 


신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가 되는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봉사하는 가장 겸손한 종이 되는 것도 바라지 않았으며, 테레사 수녀만큼 신실한 사람이 되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신은 돌아오기만 한다면 내가 저지른 일생일대의 실수에도, 실패에도 신경을 쓰시지 않을 것이다. 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신의 본성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큰 사건이 과거의 상처를 불러오는 일은 드물다. 큰 것들은 너무나 명확해, 번연히 보이기 때문에 피할 수 있다. 마치 기차가 오고 있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선로에서 물러나면 그뿐이다. 하지만 작은 일들은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상처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린다. 의식적으로 자각하고 있지 않는 한 볼 수가 없다. 


그즈음 나는 신의 경제학엔 낭비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장래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 많은 직업들이 모두 저널리스트가 되고자 했던 내 꿈을 위한 밑거름이었다. 


우리에게 무엇이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운이 아니라 선택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지, 어떻게 할 것인지, 이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갈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모두 우리에게 달렸다. 나에게 주어진 재능과 동일한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이상理想, 능력, 관심사, 재주의 총체가 바로 나라는 존재이다. 그러니 내가 원본이고 내가 걸작일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의 재능과 역할을 부러워하지 말라. 세상은 우리가 또 한 명의 테레사 수녀, 간디, 마틴 루터 킹, 마이클 조던 혹은 빌 게이츠처럼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된 우리를 원한다. 


인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두 선택지를 지속적으로 건넨다. 바쁘게 살든가, 아니면 부지런히 죽어가든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얼마나 옳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선택을 해야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을까?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용서하기는 쉽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을 용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상처받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희생자가 되고 피해자가 된다. "나는 선량했다"고 말하면서 관심과 동정을 받으려 한다. 싸구려 당의정으로 위로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의 악당이 되었던 적은 없었을까? 그렇다면 나도 희생자가 된 사람을 동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악당과 희생자라는 캐릭터에서 벗어나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 말한다. 용서는 과정이라고.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용서하기로 결정하는 것이 용서의 시작이다. 이야기를 바꾸겠다고 결심하는 순간 해피엔딩이 시작이다. 


우리 대부분은 우리가 받은 선물에 무지하다. 다른 사람이 고통 가운데 인내하고 있는 문제점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선물임을 알 게 될 때가 있다. 


"보렴. 결국에는 말이다. 신은 한 가지 질문만을 던지신단다. 너는 사랑했느냐? 음? 바로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사랑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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