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정의 소설을 사실 처음 읽었다. 7년의 밤이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몇번을 읽어보려 시도하였으나, 왠일인지 번번히 기회를 놓치게 되었고, 그러던 와중에도 다음 작품들이 나오곤 했었다. 이 책도 그렇고, 7년의 밤도 그렇고 정작 읽지는 않았음에도 대강의 스토리나 설정 등은 여기저기서 많이 들어서 이미 알고있었다. 그러던 중에 좋은 기회로 이 책 『28』을 읽게 되었는데, 사실 이 스토리 자체는 그다니 읽고싶지 않은, 아니 어쩌면 피하고싶은 스토리였다. 사실 전염병이라는 소재 자체가 너무 무서웠고, 그로인해 상상되는 상황, 고립과 불신, 공포의 이미지가 책을 읽기도 전부터 그려져서 처음 책장을 넘기기까지가 참 오래걸렸다. 하지만, 이 책을 펼치자마자 쭉 빠져들게 한 것은 바로 책 내용 그 자체였다. 첫장을 넘기면서 등장한 에필로드씬은 바로 책에 집중하게 만들어버렸다. 그러면서 왜 정유정 작가가 그리 인기있는 작가인지를 실감하게 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단순하게 전염병으로 인한 공포, 재난과 도시 봉쇄로 인한 참상 만을 그리고 있는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반려견 혹은 반려동물과 사람, 혹은 생명이 있는 것들과 사람이라는 생명체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고 있고, 이러한 비상상황에 어떠한 것이 진리인지, 어떠한 것이 최선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28》은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상징적 매개로 인간과 자연의 원초적인 '불평등 계약'의 의미를 성찰하는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정여울_작품해설)
저 상황에 나라면...이라는 꼬리표도 끊임없이 따라다녔다. 물론 계속되는 결론은 나에게는 닥치지 않는 상황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또한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주인공, 조연 그런거 상관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평등하게(?)죽었다. 이상적인 기대를 하면서 읽기에는 너무 현실적으로 참혹하게 그렸다. 가장 안타까운것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화양시 그 혼란속에 있었다는 것 만으로 무고한 생명도 많이 사라져갔다는 것이다.
전염병의 광기보다 더욱 끔찍한 것은 전염병이 아닌 '다른 이유'로 죽어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정여울_작품해설)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더 사실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서 당혹스러웠다. 작가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현실도피를 할 수 없게 만들었고, 극한의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싶어하는 우리를 '마주하고싶지 않은', 하지만 '사실에 가까운 상황'으로 자꾸 끌어다놓았다. 아마도 소설속에서 일어나는 가상의 일들이, 현실에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마치 실제로 일어날 것만 같아서 더 괴로웠던 것 같다.
이런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중간중간 동해에 대한 분노가 끊이지 않았고, 수진과 수진의 가족, 기준에 대한 안타까움, 개인적으로 멋졌던 박형사님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책을 읽고 난 이후에도 계속 머리속에 남아있는 쿠키와 스타와 링고... 마지막에 재형이 눈을 감을 때는 실제로 눈물이 나더라. 줄곧 읽는 내내 줄을 치게 만들었던 살아남는 것이 이기는 것이요 목적이라는 것. 수진을 통해서도 윤주를 통해서도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사는 것 이외에 어떠한 것이 더 중요할까? 그리고 살기위해 우리가 행하는 것들은 어떤 가치가 있고, 살기위해서 포기하는 것들은 또한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일까? 소설 한 권 읽었을뿐인데, 머리속이 너무나도 복잡해졌다. 나 그렇게 철학적인 사람 아닌데.. 살아남는 것이라는 아주 심플한 메시지였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복잡해지다니. 시간이 난다면 나중에 다시한번 읽어봐야 할까보다..
재형은 스승 누콘의 손에 구조됐다. 마야가 그를 찾아냈다. 그를 깨운 것도 마야였다. 눈뜨고 가장 먼저 대면한 것 역시 마야의 다갈색 눈이었다. 반가워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이었다.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긴 눈이었다. 조심스레 물어오는 눈이었다.
"대장, 내 아이들을 어쨌어?"
수진은 진경에게 가는 것도 한나절쯤 미루기로 했다. 아버지는 코앞에 대령하지 않으면 양말조차 못 찾아 신는 '광산 노씨 만호공파' 남자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없는 동안 드실 끼니거리는 준비해놓아야 했다. 어쨌거나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밥상 뒤에서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진경이 그걸 너무 서운해하지 말았으면 했다. 열 일 젖혀두고 달려가지 않는 자신을 너무 미워하지 않기 바랐다.
저 생때같은 생명들을 차떼기로 쓸어다가 생매장할 권리를 주가 인간에게 주었더란 말인가. 예감하고 있었으면서 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가. 건강한 개와 고양이라도 살렸어야 했는데. 어제저녁에 녀석들을 풀어버렸어야 했는데. 비닐하우스 임대가 취소되던 바로 그때에 산으로 데려가 풀어줬어야 했는데.
그녀는 움켜쥔 손을 슬그머니 등 뒤로 숨겼다. 목이 답답해왔다. 하고 싶은 말이 목젖 밑에서 신물처럼 솟구쳤다. 그때 살려고 애쓰는 것 말고 무엇이 가능했겠느냐고. 삶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본성이었다. 생명으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본성. 그가 쉬차를 버리지 않았다면 쉬차가 그를 버렸을 터였다. 그것이 삶이 가진 폭력성이자 슬픔이었다. 자신을, 타인을, 다른 생명체를 사랑하고 연민하는 건 그 서글픈 본성 때문일지도 몰랐다. 서로 보듬으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보듬고 있는 동안만큼은 너를 버리지도 해치지도 않으리란 자기기만이 가능하니까.
재형은 살아갈 이유가 있어야 살 수 있는 남자였다. 그가 링고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걸 확신했다. 재형은 링고가 아니라 살 이유를 찾고 있었다. 자신이 살 길을 찾고 있듯이. 이유와 길이 모두 충족돼야 함께 떠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런 후에야 진짜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흔히들, 사랑이라 부르는 것.
윤주는 종종 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가만있지 않는지. 안전한 자기 집을 두고 감염의 위험과 무장 군인, 추위와 허기가 기다리는 광장에 모이는 진짜 이유가 뭔지. 이 방에 홀로 남은 지금에야 그녀는 답을 알 것도 같았다. 그들은 '누군가'를 향해 모이는 것이었다. 자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걸 확인시켜줄 누군가, 시선을 맞대고 앉아 함께 두려워하고 분노하고 뭔가를 나눠 먹을 수 있는 누군가, 시시각각 조여드는 죽음의 손을 잊게 해줄 누군가를 만나고자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윤주에게 그곳은 재형이었다. 그에게로 가고 싶었다. 그가 그리웠다. 밤은 미치도록 길었다.
박주환은 다시 뒤를 돌아봤다.
"심심한데 김 기자 목표나 들어봅시다. 뭐요. 스타 기자가 되는 거? 국장이 되는 거?"
그녀는 룸미러에 비친 순경을 봤다. 순경은 앞 차창을 내다보고 있었다.
"살아남는 거요."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 박주환의 눈을 스쳤다.
"그런 것도 목표 축에 드나?"
'살아남기'는 윤주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목표였다. 그 외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다. 있을 데가 없어 친구네를 전전해야 했던 대학 시절에도, 졸업 후 취직을 할 때도, 사회부 기자로 살아온 10년 동안에도, 화양에 갇혀 있는 지금 역시 그녀는 살아남기를 원했다. 기어코 살아 나가서, 살아남느라 바빠 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고 싶었다. 살아남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 이를테면, 시속 155킬로미터짜리 속구로 사표를 던져버린다든가. 아버지를 만나러 고기리촌닭집에 간다든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재형과 함께 알래스카로 가는 것이었다. 그 곳에 철퍼덕 눌러앉아 꿈처럼 살고 싶었다. 다시는 이 나라로 돌아오지 않고, 오래오래.
"누구한텐 당연한 일이 누구한텐 목표가 되기도 해요.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깨달은 건데, 나는 후자로 태어났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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