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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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프레드 울만 『동급생』

| Mashimaro | 2018. 2. 6. 12:21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를 읽고 나서 바로 이어서 집어 든 책이다. 오히려 삶의 한가운데를 읽으면서는 생각보다 나치시절의 분위기를 아주 강하게는 못느꼈는데, 이 작품은 아예 그 시절을 타겟으로 그린 작품이었다. 우선은 책을 펼치고 생각보다 적은 분량에 가장 놀랐다. 알고보니 장편소설이 아니라 중편소설에 해당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인지 좀 더 빠르게 완독할 수 있겠다는 마음으로 읽게 되어서 부담없이 시작한 면도 있었다. 


사실 난 이 시기의 이야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조금 더 밝은 이야기를 읽고 싶고, 또 취미인 독서를 하면서 내 기분도 다운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작품은 그 시절의 이야기를 전혀 무겁게 시작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비교적 아직 때묻지 않은 아이들의 세계가 중심이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차별은 존재하고 또 그들의 능력과는 별개로 부모나 환경에 의해서 차별되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그래도 이 주인공들이 살아가는 지역에 나치즘이 완전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들의 불평등(?)도 심하지는 않아서, 아이들의 멘탈로도 어느정도 무시하며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선생님까지 합세하게 한 강력한 시대의 흐름은 특히나 아이들이 견뎌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주로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그 상황들과 심지어 유대인으로서 겪어내야 했던 사건들을 통해서 오히려 자세히 기술된 그 시절의 어떤 이야기보다도 임팩트있게 다가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사람은 주인공 한스의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에 대한 애착 및 자긍심을 갖고 살고있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에 정착한 독일인으로서의 프라이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의 흐름과 함께 겪어야했던 상실감 혹은 좌절, 그리고 그에 따른 선택이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주인공 한스가 가감없이 묘사하는 그 상황들이, 매우 간결한 문체와 쉽게 읽히는 스토리에 비해서 너무 많은 것들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이러한 점들이 이 작품이 짧은 중편임에도 불구하고 임팩트있고 울림있게 다가오게 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클라이막스는 마지막 한 문장일 것이다. 그 문장을 읽으면서, 어찌보면 뒤통수를 얻어맞는듯한 충격보다도 슬프고 마음이 아팠던 감정이 더 컸다. 오히려 우리가 그 속을 자세히 알 수 없었던 콘라딘의 복잡했을 생각과 감정들. 그리고 그가 처한 환경 안에서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했을 그 '아이'에 대해 '추측'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더 마음이 아팠다. 


개인적으로 짧은 단편이나 중편의 작품들을 선호하지 않는다. 그 설정과 배경, 자세한 내막들을 알 수 없는 것이 싫고, 독자에게 알아서 상상하고 작품을 마무리시키게 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짧은 중편의 작품을 읽으면서 오히려 길고 자세한 작가의 설명이 이어졌다면 이와 같은 여운과 슬픔은 느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세한 내막을 알리지 않는 작가의 스토리라인과 담백한 문체가 오히려 이 작품을 이끌어간 키포인트가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내가 그렇게 냉담했던 또 다른 이유는 그 아이들 모두가 너무도 현실적이어서 이미 저네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그러니까 변호사, 공무원, 교사, 목사, 은행원 등등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나 하나만이 아무 생각없이 막연한 꿈을 꾸었고 더더욱 막연한 소망을 품고 있었다.



그는 내게 악에 대해서, 추악함이 없이는 아름다움도 없듯이, 우리가 선의 진가를 알려면 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납득시키지는 못했고 우리의 대화는 교착 상태로 끝났다.



이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더 이상 삶이 무엇이냐가 아니라 이 가치 없으면서도 어떻게 해서인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인 것 같았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슨 목적을 위해? 우리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인류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해야 잘 안 되는 일을 가장 잘 할 수 있을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가 시작도 끝도 없는 내 나라, 내 집이며, 유대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붉은 머리가 아니라 검은 머리로 태어났다는 사실만큼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뿐이었다. 첫째로 우리는 슈바벤 사람이었고 그 다음은 독일인이었고 그 다음은 유대인이었다. 내가 그 외에 달리 어떻게 느낄 수 있었을까? 



채 한 시간도 안 되는 사이에 나는 내 무고한 친구를, (단지 그가 나타난 것만으로) 내 아버지의 모습을 만화에나 나올 법한 인물로 바꾸어 버린 친구를, 두 번째로 미워했다. 



그리고 또 나는 모욕을 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외톨이가 되겠어. 나는 세상의 모든 호언펠스 집안 사람들 못지않게 가치 있는 사람이야. 분명히 말하는데, 나는 누구도 나를 모욕하게 놓아두지 않을 거야. 그 어떤 왕도, 왕자도, 백작도.



그때까지 그는 용케도 침착함을 유지했지만 갑자기 격정에 휩싸여 내게 소리를 질러 댔다. 「나를 그런 두들겨 맞은 개 같은 눈으로 보지 마! 내가 우리 부모님 대신 책임을 져야 해? 그게 뭐 하나라도 내 잘못이야?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는 것 때문에 나를 비난하고 싶니? 이제는 우리 둘 모두 꿈꾸기를 그만두고 성장하면서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 아니니?



그것은 내가 독일어로 말을 해야 할 때 (비록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일종의 자기방어적인 측면이었다. 물론 나는 지금도 여전히 그 언어를, 미국식 억양이 섞이기는 해도, 썩 잘 구사할 수 있지만 그러기를 싫어한다. 내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독일을 떠올리는 것은 상처에 소금을 문지르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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