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HONG[本]'은 일본어로 '책'이라는 뜻입니다.

Books/Book Review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 Mashimaro | 2017. 12. 5. 17:12






어쩌다보니 개인적으로 머리가 아픈 독일작가의 책을 또 집어들게 되었다. 왠지 내 선입견 속에 있는 독일작가들은 꼭 이것저것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을 쓴다는 이미지가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때 조금 안도감이 생겼다. 10대 소년을 화자로 생각보다 가볍게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부를 어느정도 읽자마자 조금씩 의문부호가 떠올랐고, 보수적인 나로서는 설정 자체에 어느정도 거부감이 들었으나 소설이니까 어디 무슨얘기를 하고싶은지 읽어보자..라는 생각으로 꾸역꾸역 읽게 되었던 것 같다. 정말 무슨얘기를 하고싶어하는지가 너무 궁금했다. 나는 관련 영화도 본 적이 없고, 이 책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실 이 작품의 장르조차 모르고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 책이 정말 단순한 이런 로맨스가 주로 된 소설이라면 난 미친듯이 앵그리리뷰를 썼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나마 나에게 다행인 것은, 이 작품은 그렇게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니나다를까 독일작가들이 꽤나 자주 소재로 사용하는 홀로코스트 문제가 등장했다. 2부에서는 한나의 과거와 현재를 중심으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되는데, 여기서부터가 머리가 아파지는 포인트이다. 결국 독일작가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이번에도 들어맞은 셈이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작년에 읽었던 '한 여름밤의 비밀'이라는 작품이 생각났다. 이 또한 추리소설이지만 결국에는 유대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마도 독일인에게 있어서 역시나 이 부분은 잊을 수 없는 멍에와 같은 소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2부 이후에 한나의 재판과 수감생활의 과정을 통해서 과연 홀로코스트와 같은 거대한 문제를 당시 개개인의 각 상황에 적용해 보았을때 어떠한가에 대한 의문을 던져주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문제제기는 비단 이 작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을 포함한 모든 전쟁의 잔해가 남아있는 곳에서 언제나 일어나는 문제일 것이다. 즉,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섣불리 정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또 '군함도, 끝나지 않은 전쟁'을 읽으면서도 뼈져리게 느꼈지만, 특히나 그 당시를 살아온 개개인의 문제들은 현재 진행형으로 아직도 끝나지 않은 문제들이 많이 남아있다. 독일은 그래도 일본보다 많은 부분을 정리하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소설 안에서 미하엘을 수용소까지 태워주던 한 운전사와 같이 아직까지도 심리적으로는 정리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을 것이며, 이것은 이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는 한 쉽사리 정리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문제를 소설을 통해서 던지는 것은, 아마도 이 작가가 법을 전공한 교수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한나의 범죄 역시 이 문제에서 자유할 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컴플렉스인 '문맹'이라는 설정 역시 그녀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어도, 그것이 모든 상황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과연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라고 했을때, 섣불리 그렇다라고는 말할 수 없겠다. 또한 우리는 그들과 우리를 완전히 분리하여, 그들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우는 것으로 상대적인 면죄부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한나를 어느정도 동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어도, 적어도 그녀가 사이코패스와 같거나 진정한 나치였다거나 하는 식의 비난은 힘들지 않을까 싶다. 거대한 시대와 상황에 맞서서 분연히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야말로 후대에 영웅으로 인정받을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에 순응하거나, 혹은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의 판단조차 힘들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다보니 왠지 무력함이 남는 느낌에 허탈하기도 하지만, 아마도 작가는 한나를 통해서 그래도 시대적인 큰 틀이 아닌, 인간적으로 생각했을때에, 이러한 삶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의문을 던져주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가벼운 소설인 척 속여서 여기까지 머리를 복잡하게 만든 이 작가가 조금은 밉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서도 안 되고,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을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되며 자꾸만 물어봐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질문자는 그 끔찍한 사건들 자체를 문제로 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 앞에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의사소통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경악과 수치와 죄책감을 느끼면서 그것들 앞에 침묵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렇다고 내가 세미나에 임할 때 보였던 탐사와 진상 규명의 열성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쉽게 식어버렸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판결을 받고 형을 살고, 제2세대인 우리들은 경악과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입을 다무는 것, 그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전부인가?



아버지는 일단 말을 시작하자 아주 먼 곳까지 소급하여 올라갔다. 아버지는 내게 개인과 자유와 품위에 대하여,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인간을 객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 등에 대해서 가르쳐주었다. 




'공감'과 '댓글'이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