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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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네 안에 살해된 어린 모차르트가 있다』

| Mashimaro | 2017. 12. 14. 07:11






이 책은 「어린왕자」의 작가로 잘 알려진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에세이이다. 프랑스어 판은 '인간의 대지(Terre des hommes)', 영어판은 '바람과 모래와 별들(Wind, Sand and Stars)'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고 한다. 한국어판 제목과는 굉장히 분위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여러 버전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이 작품은 굉장한 사유의 결과물이다.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인 어린왕자가 어떻게 쓰여지게 되었는지도 어느정도 엿볼 수 있는 느낌이다. 


기본적으로는 생텍쥐페리가 비행기 조종사로 활동하면서 겪게된 몇가지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있다. 당시 그가 활동하던 시기는 1900년대였는데, 그가 실종된 시기가 1944년이니,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이자 한창 전쟁 속에 있을 시기였다. 그러다보니 에세이 속에서도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서 인간에 대해 고찰한 내용들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다보면 비행기 조종사로서의 정체성이 많이 드러난다. 실제 생텍쥐페리가 이 책 이전에 내놓은 2편의 작품들도 그러했고, 조종사로서 활동하는 가운데 느끼는 사유의 결과물들을 책으로 내놓는 식이었다고 본다. 그 중에서도 사막에 추락하거나 사막에서의 반군들과의 만남 등을 통한 작가의 사유가 이 책의 가장 중심뼈대인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줄곧 등장하는 사막이라는 곳과, 또 비행을 하면서 바라본 자연의 모습을 통해서 작가가 보는 고유한 시점에 빠져들게 된다. 따라서 이 책의  프랑스어판 제목과 영어판 제목에 납득할 수가 있다. 아무래도 한국어판 제목을 선정한 데에는 마지막 장의 내용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무래도 번역자가 선택한 것은 작품안에서 보이는 많은 사유들 중에서 '인간들'에 대한 부분에 좀 더 집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린왕자가 사랑을 받았던 것들은 작가의 이러한 깊은 생각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린왕자가 많은 부분들을 쉬운 비유로 이야기했다면, 이 책은 어느정도 직접적으로 그리고 조금은 더 어려운 묘사로 설명되고 있는 느낌도 있다. 그렇기에, 작가가 어린왕자와 같은 작품들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한 속내, 혹은 사고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내가 어린왕자를 작년에 다시 읽었을때 어린왕자의 스토리보다 작가인 생텍쥐페리의 삶이 더 궁금해졌던 기억이 있다. 적어도 이 작품을 통해서 그에 대해서 조금은 알게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승객들을 지치게 만드는 단조로운 풍경도 승무원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지평선이나 수평선을 가르는 구름덩어리도 승무원에게는 단순한 무대 장식이 아니다. 


처음에는 비행기가 조종사를 심각한 자연재해로부터 떼어 놓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그 기계에 의해 우리는 더욱 더 엄격히 굴복하게 된다. 폭풍우 치는 하늘이 만들어 놓은 거대한 법정 한복판에서 조종사는 자신의 비행기를 걸고 산, 바다, 뇌우라는 자연계 신들과 싸우는 것이다. 


인간됨이란, 정확히 말해 책임을 지는 것이다. 그것은 제 탓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비참함 앞에서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동료들이 거둔 승리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돌을 놓으면서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무언가를 기꺼이 감수하는 책임감에 근원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영혼의 빈곤이나 지나친 젊음을 드러내는 증표에 불과하다.


오늘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제의 세상을 위해 만들어진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거야. 즉, 과거의 삶이 우리 본성에 더 잘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지 그 삶이 우리의 언어에 더 잘 부합하기 때문인 거지.


마침내 오늘에서야 우리는 목마름을 느꼈다. 그리하여 우리가 흔히 알던 그 우물이 자신의 영역에서 환히 빛나고 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여인 한 명이 그런 식으로 집안 전체에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다. 우물도 사랑처럼 멀리 퍼져 나간다. 사막은 처음에는 공허하다. 하지만 반군의 습격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두른 커다란 망토의 주름을 모래 위에서 읽어 내는 날이 온다. 반군 세력마저도 사막을 변화시킨다. 우리는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였고, 게임은 우리를 자신의 형상에 따라 빚어 간다. 사하라가 모습을 드려내는 곳은 우리의 내면이다. 사막에 간다는 것은 오아시스를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샘을 우리의 종교로 삼는 것이다.  


이 본질적인 것을 끌어내려고 한다면, 잠시라도 분열을 잊어야 한다. 분열을 인정하는 순간, 한 권의 코란만큼이나 완고한 진리들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맹신이 생겨난다. 사람들은 좌익과 우익으로, 꼽추와 꼽추가 아닌 사람들로, 파시스트와 민주주의자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구분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진리는, 당신도 알다시피, 세상을 단순화시키는 것이지 혼돈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란 보편성을 이끌어내는 언어이다.


뉴턴은 수수께끼를 풀듯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법칙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뉴턴이 한 것은 창조이다. 풀밭에 사과가 떨어지는 것과 해가 뜨는 것을 동시에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의 언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진리란 절대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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