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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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마틴 피스토리우스, 메건 로이드 데이비스 『엄마는 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Mashimaro | 2017. 6. 23. 20:51



일본어 리뷰 [Japanese Review]

マーティン・ピストリウス 『ゴースト・ボーイ



이 책의 저자인 마틴은 어려서 발병한 근육을 사용할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전신마비 상태에서 의식을 잃었는데, 열여섯 살 무렵부터 의식이 돌아왔다. 하지만, 겉으로 보았을때 전신마비 상태였기 때문에 누구도 마틴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자식의 모습에서 절망하여 자살까지 시도했던 엄마가 내뱉은 한마디 말로 만들어진 이 책의 제목이 내 눈을 끌었다. 엄마의 절망감, 그리고 그 말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으면서도 아무런 표현조차 할 수 없었던 마틴의 상황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제목이라 생각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부분은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비단 언어 뿐만이 아니라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의사소통이라는 것이 완전히 봉쇄되었을 때, 과연 무엇이 가장 힘들고 비참한 것인지를 마틴이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언어로도 몸으로도 전혀 표현할 수 없던 마틴이 가장 상실감을 느꼈던 것은 의사표현이었다. 자신이 표현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학습되면서부터, 결국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선택을 포기하며 살아왔던 것을 잘 알 수 있다. 그런 마틴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했을 때에 얼마나 당황했을지 책에서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잘 모르겠다. 지금껏 누군가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사람들이 내 입에 빨대를 물릴때,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뭔가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임을 알기에 뜨거운 차를 황급히 들이켜는 대신 차가 좀 식을 때까지 놓아두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될까?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 어디로 갈지, 누구를 만날지 등등, 사람들은 날마나 수천 가지 결정을 한다. 그런데 내가 단 한 가지라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나더러 뭔가를 결정하라는 것은 마치 사막에서 자란 아이에게 바다 속으로 뛰어들라고 하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이 책은 재활에 대한 책도 아니고, 또 고난을 극복한 사람이 어떠한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류의 책도 아니다. 이 책은 마틴이라는 한 사람이 의식이 돌아오면서부터 하나의 가정을 꾸리기까지의 시간동안 작성한 에세이이다. 그저 자신의 삶 동안에 자신이 보았던 것, 그리고 느꼈던 것들을 그대로 이야기해준다. 특히 그가 의식이 돌아왔으나 아무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던 6년동안의 기록은, 우리가 평소해 무심코 지나친 일들이 상대방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느끼게 해준다. 혹은 우리가 갓난아이에게 하는 행동이나 약자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에게 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우리의 자의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과연 봉사라는 것이 얼마나 그 대상을 위한것인지.. 혹은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미션클리어 였던 것은 아닌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사람의 감정과 생각이라는 것을 고정관념을 통해서 보았을때 얼마나 잘못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뼈저리게 느꼈다. 


책을 다 읽었는데도 그의 솔직한 말투가 아직도 들려오는 것 같다. 분명 육성으로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육성보다도 더 자세하고 진실되게 전달이 되었던 것 같다. 마틴이 버나를 만난것, 그리고 의사소통시스템을 사용하면서 한발짝 내디뎠던 것은 그의 삶에도 그리고 이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도 굉장히 행운이었던 것 같다. 특히 책의 말미로 갈수록 미소지으며 읽게되는 빈도수가 늘어난다. 굉장히 힘든 경험에 대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어두운 내용의 책이 아니라는 것이 참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새출발이 결말이 되었으니, 앞으로의 매일매일이 마틴과 조애나에게 더욱더 즐거운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고정관념에 갇혀 살아간다. 자신이 보고있는 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해도 말이다. 그래서 '차 마실래?'와 같이 간단한 질문에 머리를 돌리거나 미소를 짓는 식으로 대답할 만큼 내 상태가 호전되었어도 누구 하나 이런 행동의 의미가 무언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버나가 한 말은 뭔가 달랐다. 다른 사람들처럼 혼잣말을 하거나, 불특정한 대상 혹은 빈 방에 대고 말을 한 게 아니었다.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햇빛 속에 떠다니는 먼지처럼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또래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이십대 친구들끼리 흔히 나누는 일상 대화였다. 머지않아 버나는 몸이 편찮은 할머니 때문에 속상해서 새로 데려온 반려견, 데이트할 생각에 설레는 남자친구의 존재에 이르기까지 온갖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으로 친구가 생긴 기분이었다. 



그런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 같은 아이들을 돌보는 사람들 중에는 나쁜 사람보다는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웃는 얼굴들이 연달아 눈앞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미소 지었고 핑크라는 단어가 내 그리드에 추가되었다. 지금 내가 추가하고 싶은 색깔은 터키색이다. 엄마가 여러 색깔의 이름을 대는 동안, 나는 어떻게 하면 여름 하늘의 색깔을 잘 설명할 수 있을지를 궁리한다. 



엄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엄마는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가 죽어야 해."

엄마가 그렇게 말한 순간 온 세상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엄마가 고요한 방 안에 나를 남겨두고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날, 엄마가 바라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는 말을 듣고 있자니 이제 그만 삶을 내려놓고 싶었다. 



마크의 엄마는 더 이상 운명에 맞서고 있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이 필연임을 받아들이고 매일 아침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떤 기분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말이다. 마크의 엄마도 우리 엄마도 괴물이 아니었다. 그분들은 다만 두려울 뿐이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엄마의 과오를 용서하는 법을 배웠다. 하지만 요즘 엄마를 보면, 내가 원하는 색깔을 그리드에 추가하려고 온통 신경을 집중하느라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 엄마가 스스로를 용서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랬기를 바란다. 



지난주에 처음으로 컴퓨터를 고쳤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다. 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감정을 다시금 느낀다. 다소 낯선 감정이다. 마치 공작이 오색찬란한 깃털을 활짝 펼치는 것처럼, 나를 한껏 부풀게 하고 생기있게 만드는 기분. 이제 나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안다. 바로 자부심이다. 



아빠는 비틀거리는 나를 부축해 바다 쪽으로 몇 걸음 더 움질일 수 있도록 인도하면서 말을 이었다. 

"너는 안전해."

하지만 바닷물이 내 발과 다리 주변에 말려들자 나는 두려움으로 새파랗게 질렸다. 나는 바다에 휩쓸릴테고 결국 떠밀려갈 수밖에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불현듯 아빠가 내 곁에 더 바짝 붙어 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빠가 네가 떠내려가도록 놔둘 것 같니?"

아빠는 파도 소리에 맞서 큰 소리로 외쳤다. 

"지난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데 내가 여기서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게 둘 것 같아? 아빠 여기 있다, 마틴. 내가 널 붙잡고 있어. 아무 일도 생기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 없어."



의사소통에서 이러한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는 말을 할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이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나의 재활은 많은 사람들-버나, 부모님, 의사소통센터의 전문가들-의 공동 작품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지금처럼 말할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다른 이들은 나처럼 운이 좋지 못하다. 



누군가 망가지고, 뒤틀리고, 쓸모없는 몸을 만져주며 내가 그저 끔찍하기만 한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나서야 타인들 하나하나가 내게 베푼 것들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해주는 사람들은 가족들이지만 타인들도 우리를 구원해줄 수 있음을. 비록 그들은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해도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몸담을 자격이 있는 한, 내가 어디까지 올라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서서히 깨달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자신감이 늘고 동료들에게 신뢰 받는다는 느낌이 커졌다. 인생은 결국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적용되는, 소소한 성공과 사소한 실패의 집합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홀로 배워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생은 흑백이 아니라 무수한 회색 그림자로 이루어졌음을 깨달으면서 나는 때로 틀릴지언정 점차 나의 판단을 믿는 법을 배웠다. 



어느 날, 혼자 점퍼를 입으려고 애를 쓰다가 낙심한 내게 그녀가 말했다.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 손이에요. 손을 좀 쉬게 해주고 내일 다시 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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