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처음 읽기시작했을때, 이 작품이 희곡인것을 알고 어느정도 각오를 하고 읽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읽은 희곡들이 셰익스피어의 것들이 많았고, 또 이 작품 직전에 읽은 희곡이 무려 실러의 '도적 떼'였기 때문이다. 이 작품들을 읽으면서 난 희곡이랑은 잘 맞지 않는가보다. 매력을 잘 모르겠다라고 계속 느끼고 있어서인 것 같다. 하지만, 1막을 채 다 읽기도 전에 느끼게 된 것이, 아마도 지금까지 읽은 희곡 중에서 가장 이해하기 쉽고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일단, 이전의 희곡들과는 달리 현대적이라고 해야할까, 지문이나 상황을 설명하는 것들 그리고 대사 자체가 비교적 현실적이다. 과장된 수사와 알수없는 단어들의 나열로 내용파악하기가 어려웠던 이전의 희곡들과는 다르다. 전통적인 연극보다는 한편의 드라마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 가장 큰 인상이었다.
제목에서 보여지는 것 처럼 이 작품은 피그말리온 신화를 모티브로 해서 쓰여졌는데, 결말은 신화와 다른방향으로 매듭지었다. 이는 작가가 완전히 의도한 결말이고, 아마도 그래서 난 이 작품에 한표 더 던질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마이 페어 레이디'라는 뮤지컬의 원작이기도 하다보니 아무래도 연애나 사랑에 관한 색깔이 진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그러한 관점으로는 전혀 보고있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연애소설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사회비판적인 색깔이 강하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러한 전개를 위해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분명히 하고있다는 점이 또한 독서를 하기 쉽게 하는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 내가 인상적으로 보았던 인물은 일라이자의 아빠인 둘리틀이었는데, 사회빈곤층의 굉장히 나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언이나 행동은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가감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은근히 사이다로 느껴지는 대사들이 꽤 있었다. 예를들어,
"그게 비극입니다, 부인. 포기하라고 말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배짱이 없습니다. 우리 중 누가 그런 배짱을 가지고 있습니까?"
와 같은 부분을 보면, 자신을 은근히 비꼬며 그럼 포기하면 되지 않느냐라는 히긴스 부인의 말에 너무나도 솔직한 답변을 한다. 이는 아마도 작품에 등장하는 상류층들의 허위허식이나 자신을 꾸며서 자기자신을 하나의 이상적인 캐릭터로 만들어가는 이들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물은 여주인공인 일라이자 일 것이다. 그녀는 히긴스 덕분에 상류사회에 합류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앞에서 당당해진다.
"나는 꽃을 팔았지 나를 팔지는 않았어요. 당신이 나를 숙녀로 만들어 버려서 나는 이제 어떤 것을 팔아도 어울리지 않아요. 나를 발견했던 그곳에 그대로 놔두지 그랬어요."
어찌보면 이 무슨 적반하장인가 싶기도 하다. 가르쳐 놨더니 이런다. 뭐 어쩌라는거야? 같은 식의 반응이 나올 법도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듣는 귀가 좋다는 말이 몇번이나 나오고 있는데, 음성학을 배우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이는 분명히 큰 탤런트, 그러니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다. 히긴스가 피그말리온과 같이 완전히 그녀를 창조해 낸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히긴스는 하나의 기회를 만들어 준 계기이며, 분명히 그 미션을 완성해 나간 것은 일라이자의 노력과 재능에 의한 것이라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정작 당사자는 상류사회에서 통할 수 있는 여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기를, 직접 신사의 표본을 보여준 피커링 대령의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제가 윔폴 거리에 처음 온 날 저를 둘리틀 양이라고 불러 주신 거요. 그게 제게는 자기 존중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대령님에게는 자연스러운 거라서 알아차리지도 못할 자잘한 행동들이 몇 백개나 있었어요. 일어나신다든지, 모자를 벗으신다든지, 문을 열어 주신다든지..."
이처럼 그녀의 자존감 회복을 포함해서, 언어나 말 뿐만이 아닌 몸에 베인 습관과 행동들을 통해서 자연스레 습득해갔던 과정들이 어쩌면 더 중요했다고 본다. 결국 히긴스 교수는 피그말리온과 같은 창조주로 설정이 되었으나, 정작 실질적으로 그녀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는 의외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사족이긴 하지만, 결국엔 일라이자와 결혼하게 되는 프레디의 캐릭터는 개인적으로 맘에 들지는 않는다. 그의 친절함은 칭찬할 만 하지만, 이상적인 캐릭터는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아마도 작가는 그래서 더욱 그러한 결말을 만들었겠다 싶기도 하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 작품이 음성학과 언어를 소재로 전개된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참 흥미로웠는데, 마침 최근에 일본인에게 한국어 과외를 하게 되면서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외국인이 한국어를 발음할 때에 우리가 일차적으로 느끼는 이미지라든가, 이차적으로 외국인인데 이렇게 한국말을 할 수 있다니!라는 감탄사로 이어지는 사고의 전환도 생각해 보게 되었고, 나 또한 일본어를 공부해서 지금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입장으로써 네이티브에 가까운 발음을 하고싶다는 생각과 열정이 커서, 과연 이건 무엇을 위한 것인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사실 언어는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수단인데, 이미 대화는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수준인데, 네이티브와 같은 수준으로 일본어를 사용하고 싶다는 끊임없는 열망은 정말 사회적인 요인이 크다고 본다.
실제로, 몇년 전까지 우리 연구실에는 외국인 유학생이 딱 2명이었는데, 중국인 유학생 1명과 나였다. 세부전공분야도 같았고, 성별도 같았는데, 언어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면, 그 친구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독학을 한 친구이고, 나는 한국에서 일문학을 전공하고 온 상태였다. 대화에서는 전혀 둘 다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인데, 그 친구의 약점은 존경어와 겸양어에 서툴다는 것이었다. 사실 일본어는 존경어부터 훈련하면 이후에 반말은 금방 익숙해질 수 있는데, 반대의 경우가 되면 굉장히 힘들어진다. 문제는 이 공간이 학교, 연구실이라는 학술적인 목적을 갖는 특수한 공간이었고, 그친구에게는 자연스레 어떤 이미지가 붙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던 그 친구는 정작 학업적인 면에서는 꽤나 고전을 해야만 했다.
'언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포괄적인 개념과 영향이라는 것이 정말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굉장히 사회적인 것이며, 또한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는 개념이고, 이를 작품에 소재로 가져다 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작가가 참 대단하다고 평가하고 싶다.
결론은, 난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어서 이 작품이 좋았다.
피그말리온 신화는 19세기 영국에서 매우 인기를 끌었다. 윌리엄 모리스의 시 「지구의 천국 The Earthly Paradise」뿐 아니라 W. S. 길버트의 희곡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Pygmalion and Galatea」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이 신화와 유사한, 하류층 소녀가 은인의 도움으로 숙녀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멜로드라마적 특성을 가미하면서 19세기 드라마의 유행 상품이 되었다. 하지만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의 영향을 받은 쇼는 「피그말리온」에서 신분, 언어, 교육, 빈곤, 여성 등의 사회 문제를 본격적으로 극화한다. 또한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갈라테이아에 해당하는 일라이자가 자신을 숙녀로 변신시킨 피그말리온인 히긴스와 맺어지는 해피 엔드를 거부한다. 낭만적인 결말 대신에 이 극은 철저하게 문제를 분석하고, 문제에 대한 현실적 해결에 주목한다. (김소임_역자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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