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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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페터 한트케 『어느 작가의 오후』

| Mashimaro | 2021. 4. 15. 19:23

 

 

 

 

 

정말 우연히, 충동적으로 책을 집어들었다. 물론 책을 사놓기는 진작에 사놓았다. 페터 한트케가 노벨문학상을 받게 된 이후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당연히 쉽게 읽힐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쉽게 술술 읽었던 경험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그러했다. 분량이 꽤나 짧아서 금방 읽기는 했지만, 분량에 비해서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사실 이 작품이 어려웠다기 보다,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어느 작가의 오후를 여러가지 배경 속에서 굉장히 몽환적 혹은 환상적으로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가 '그'라고 지칭하며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화자'와 '그'가 자꾸 동일시 되어버리는 느낌은 대체 왜일까? 어쨌든 내용 자체가 어려웠다기 보다는 뭔가 생경한 느낌으로 끝까지 읽게되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나에겐 익숙하지 않은 서술형식이었다는. 

 

하지만 그 안에서 또 마음에 와닿는 부분들도 있고, 공유하는 감정들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마냥 유쾌하진 않았던 것이, 전체적으로 잔잔해보이면서도 그 안에서 너무 공허하고 쓸쓸한 느낌들도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작가로서의 감정과 고민들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은 좋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괴로움의 영역이 비교적 크게 느껴져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작품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결국 작가가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들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부분에서는, 조금 궁금증이 일었다. 나처럼 쉽게 책을 읽으려는 사람에게는 깊이 전달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충분히 전달하였음에도 내에게 와닿지 않았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은 참 많이 하게 된 것 같다. 조금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을때 한번 더 읽어봐야겠다.  

 

 

 

작가는 교차로에서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서 있었다. 자신의 활동을 통해 어떠한 생활 질서도 미리 그려 놓지 않는 그는 보잘것없는 나날의 움직임에도 하나의 이념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러한 이념은 두 가지, 즉 변두리와 중심을 연결시키려는 생각, 중심을 통과해서 변두리로 걸어가려는 생각과 함께 찾아왔다. 바로 그래서 그는 책상을 떠나 사람들 근처로 가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번번이 무시되기는 했지만 또다른 맹세를,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강을 건너 신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으로 가자는 맹세를 해온 것이 아닐까? 이제 그는 길이 갈라지는 곳에서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다.

 

걸을수록 일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이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서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작품 활동을 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작품〉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재료란 거의 중요하지 않고 구조가 무척 중요한 것, 즉 특별한 속도 조절용 바퀴 없이 정지 상태에서 움직이는 어떤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선들을 대신하여 끼적거려 쓴 검은 글자들이 관찰자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달했다. 펜을 눌러 쓴 것, 펜의 이중(二重)의 교미욕, 잉크가 튄 얼룩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격렬한 긴장. 종이는 늘 새롭게, 번번이, 헛되이 공격당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또 다른 무언가가 사람의 손이 닿아 훼손되고 지워진 설형 문자로부터 출발했다. 하나의 위협이자 수취인에게 달려드는 죽음과 종말의 전조가.

 

번역가의 질문은 순식간에 결정되었다(번역 책임자는 자신이 했던 모든 말에 대해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직후에 번역가는 예전 영화관의 어두운 대기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시간에 미리 준비한 것처럼 논리정연하고 차분하게. 그는 이 도시뿐만 아니라 유럽에 관해서도 잘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집 주인의 음성처럼 들렸다. 때마침 머리가 허연 우아한 술집 여주인이 라디오를 들으며 활 모양으로 굽어진 황동 카운터 뒤에서 그의 부인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번역가는 마치 전령이 통고할 때처럼 몇 개의 문장을 말하기 전에 먼저 음을 길게 끌며 웅웅거렸다.

 

 

말하자면 그는 〈모든 요소들이 자유로운 상태로 열려 있는 것, 누구나 접근 가능할 뿐 아니라 사용한다 해서 낡아 떨어지지 않는 것이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홍성광 _ 역자해설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원자, 페터 한트케의 삶과 작품)

 

한트케가 문학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끔찍스러운 현실이 아니라 사실 이상적인 것, 시적인 것이다. (홍성광 _ 역자해설 | 보이지 않는 세계의 구원자, 페터 한트케의 삶과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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