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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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김시영 『괜찮아, 안죽어』

| Mashimaro | 2019. 12. 12. 01:47






이 책 역시 리디셀렉트를 통해서 읽었다. 사실 책은 대부분 충동구매를 하는 편인데, 일단 맘에 들거나 언젠가 읽을 것 같은 책은 무조건 사두는 편이다. 종이책도 그런데 하물며 전자책은 더하겠지.. 그런데 심지어 리디셀렉트는 대여임에도 책장에 쟁여놓는 권수에 제한이 없다. 덕분에 일단 읽고싶은 책은 무조건 추가해 두었다가 하나씩 꺼내읽는 편이다. 이 책 역시 그러한 연유로 책장에 킵해두었던 책 중에 골라읽었는데, 사실 저자의 직업이 의사인지 조차 모르고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작가는 의사선생님으로, 응급실에서 근무하던 분이었는데 시골 동네의원으로 맡게되고, 그곳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풀어내고 있다. 그러다보니 등장인물 대부분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기도 한데, 이들과 부대끼면서 겪는 이야기들이 쏠쏠하게 재미있다. 내가 어려서부터 할머니랑 함께 생활해서 인지, 왠지 더 정감가는 느낌도 들었다. 정말 피식 웃기도 하고 폭소를 터뜨리기도 하면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하지만 웃기기만 한 책도 아니어서 눈물도 찔끔찔끔 나는 메말랐던 감정선을 건드려주는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재미있으면서도 가볍지 않은 책이라고 할까?


물론 작가도 이야기하고 있는 대로, 물론 좋은 에피소드들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러가지 부딪치고, 또 짜증나고, 이해못하는 상황들도 많았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그러한 일들도 추억으로 미화할 수 있고, 혹은 세월이 지나면 웃으며 회상할 수 있는 에피소드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 시골 의사선생님의 이야기는 나를 울리고 웃기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할매.” “왜?” “괜찮아, 안 죽어요.” 문득 치밀어 오른 그 무엇 때문이었을까? 정말 간만에 나의 오래된 유행어가 튀어나왔다. 내 말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할매는 ‘아이고’ 소리를 내며 허벅지 주무르던 것을 멈추고는 별말 없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진료실을 나가는 할매의 뒷모습을 보며 ‘오! 아직도 이 말이 먹히네’라는 유치한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런데 무슨 일일까? 진료실을 나서려던 할매가 천천히 몸을 돌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인사를 하시려나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마주 보는데 할매가 말한다. “다 죽어, 사람은.”  


다행히 증상이 심하지는 않아 설사약 3일분을 처방한다. 그런데 처방전을 손에 쥐고 나간 할매가 처음보다 더 거친 숨소리를 내며 다시 문을 열고 들어온다. ‘뭐, 왜요, 또?’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내게 할매는 쉬익쉬익 하는 거친 숨소리 사이사이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어··· 가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께··· 내가··· 그니께··· 원장님헌티··· 새해··· 인사를··· 안 했어.” 겨우 그 말을 하려고 헐떡거리면서 저 계단을 다시 올라온 거냐고 물으니 숨이 차서 대답은 못 하고 그저 고개만 끄덕인다. 순간 나도 모르게 무모한 이 할매의 손을 잡고 또 한 마디 하고야 만다.   “아이고, 우리 할매 하루에 두 번씩이나 계단 올라오는 걸 보니 앞으로 40년은 더 사시겠구먼.” 할매는 숨이 더 차서 그런 건지 웃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좋아서 그런 건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침을 해대며 연신 손사래를 친다. 발그레한 할매 볼을 보며 나도 웃는다. 물론 마음속으로.


이제 더 이상 그런 급박하고 괴로운 일들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조그만 동네 의원의 진료실로 옮겨 온 나는 그 고통으로부터 완벽하게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지하지 못했을 뿐 나는 여전히 죽음과 마주하고 있었다. 매일 죽음을 목격하던 곳에서 조금 벗어나 있을 뿐 여전히 내 사람들은 죽고, 살아나고, 떠나고, 남겨지고 있었다.


끝의 차이. 나는 아직 그 차이를 스스로 메우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보호자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던 내가 거꾸로 보호자로부터 사망 소식을 전해들은 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자리에서 일어나 진료실을 나가는 보호자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게 전부니 말이다.   응급실을 벗어난 지 어느덧 10여 년, 어느 정도는 이 생활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나는 아직 멀었나 보다.


글쎄다. 응급실에서 근무할 때처럼 죽어가는 누군가를 소생시켜 중환자실로 올려 보내고 소생기록지를 적던 상황이 벌어진 것도 아닌데 ‘그래도 참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드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1시간 이내에 생사가 결정되던 당시와 비교하면 1주일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된 과정이지만, 어쩌면 그런 이유로 이 다행스러운 감정이 더 오래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결정의 기준과 방법,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 이 모든 것이 변했지만 ‘그래도 참 다행이야’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이 순간만은 변하지 않고 오래 반복되면 좋겠다.


“알아서 하셔.” “걱정 안 되세요?”   수축기 혈압이 120에서 130으로만 올라가도 호들갑을 떨며 이러다가 잘못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난리를 치는 몇몇 사람이 떠오르는 바람에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물은 건데 할매는 피식 웃는다. “알지도 못하는 내가 걱정해서 뭐해. 원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려고.”   그러게 말이다. 할매 말처럼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해야 하는 ‘내 일’이다. 내가 고민하고 물어보고 찾아보고 약도 바꿔 가며 다시 확인해야 할 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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