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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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미야시타 나츠 『기쁨의 노래』

| Mashimaro | 2019. 1. 28. 20:22



일본어 리뷰 [Japanese Review]

宮下奈都 『よろこびの歌』




미야시타 나츠는 《양과 강철의 숲》으로 알게 된 작가이다. 이 책이 서점대상 후보에 올랐을 당시, 진작에 책은 구매해 두었는데, 아직까지도 읽지 못했다. 그러다가 리디셀렉트에 올라온 이 책을 보고는 먼저 읽어보게 되었다. 일단은 내용이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았고, 또 이 작가의 색깔을 조금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먼저 읽어보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목적은 어느정도 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스토리가 나름 단순하고 학원드라마 같은 이야기일 수 있겠으나, 굉장히 따뜻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확실히 들었다. 그리고 이 부분이 내가 갖게 된 작가 미야시타 나츠의 이미지이다. 


아직 이 작가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또 하나의 특징이라 한다면.. 이 작품도, 그리고 양과 강철의 숲》도 '음악'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이 작가는 음악을 소재로 하는 작품을 주로 쓰는걸까? 아니면, 우연히 내가 알게된 작품이 모두 음악을 소재로 한 것일까? 아직은 자세히 찾아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음악에 대해 꽤나 관심이 많은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음악'을 통해서 상황과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확실히 이 작품은 《꿀벌과 천둥》처럼 스펙터클하거나 책 속에 푹 빠져들어가게 하는 부분은 없다. 그보다 훨씬 잔잔하고, 굳이 구분해보자면 아마도 음악이라는 매개를 통한 여러가지 사유들을 잔잔하게 들려주는 느낌이다. 또 그래서 그런지 마음에 남는 대사나 글들이 꽤 있었다. 극적인 스토리를 좋아한다면 지루한 스토리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평소에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혹은 그 작가의 생각이나 세계관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많은 걸 보고, 하고 싶은 걸 하렴. 어떤 길로 나아가든지 음악은 언제나 곁에 있으니까." 특별히 음악은 배우지 않았다. 절대음감은 늦어도 세 살 전에 시작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다는 사람들의 말에 엄마는 코웃음을 쳤다. "절대음감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게다가 어릴 때부터 억지로 주입시켜야 꽃피는 재능이라면 굳이 피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나는 언제나 혼자다. 하지만 외롭지는 않다. 혼자와 외로움은 전혀 다르다. 


생각하고 생각해서 말해본다. 되돌리고 싶다고 계속 과거에 얽매여 있다면 여전히 난 미래를 잃은 채일 것이다. "사키는 소프트볼에 열중할 수 있었으니까 분명 다음이 와. 하나의 일에 열중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일에도 열중할 수 있어. 소프트볼로 그런 밑바탕을 만들어온 거잖아."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어." 고리에가 큰 소리로 말했다. "그렇게까지 열중할 수 있었던 게 하나라도 있으면 그걸로 인생 한판승이야."


그러네, 나는 대답한다. 평범한가 어떤가가 좌절감의 깊이에 직접 비례하는 건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절망은 언젠가 반드시 회복할 수 있잖아 — .” 내 말이 끝나기 전에 미타니 군이 말했다. “회복 같은 게 될까? 아빠가 돌아가신 상처가 완전히 없었던 것처럼 되기는 힘들지 않을까? 각자가 가진 어려움의 크기나 깊이는 그 사람밖에 잴 수 없어.” 그렇겠네, 나는 또 대답한다. 정말로 그렇다. 나의 이 절망은 나밖에 잴 수 없다.


방공호를 만드는 사람, 음악실을 만드는 사람, 노래하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 유혹하는 사람, 거절하는 사람, 주저하는 사람. 수많은 사람이 있고 이제 나도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와, 좋은가 나쁜가는 별개다. 다만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마다의 생각을 현실로 바꿔가는, 우리가 그런 모습이라고 하면.


진짜 피아노를 사줄 수 없는 아빠의 마음도 치나츠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치나츠에게는 뭐든지 부족함 없이 받으며 자라온 내게는 없는 강인함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자기 비하 같지만 아니다. 다 받으며 자란 걸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나는 스스로 타이른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살리는가다.


세계는 73억의 사람 수만큼 존재하고, 그와 동시에 하나뿐이다. 아무리 현실 도피를 해도 나는 여기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작은 거리에도 반 친구들이 살고, 선생님이 살고, 그리고 학교와는 관계없는 사람들이 그보다 더 많이 살고 있다. 피아노를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었던 아이도, 바이올리니스트를 엄마로 둔 오만한 딸도 여기에서 살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살아가는 것이다. 전문적인 공부를 하지 않으면 통하지 않는 음악이라면 그건 누구를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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