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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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 Mashimaro | 2021. 3. 31. 22:05

 

 

 

 

3권이나 되는 이 긴 스토리를 결국 다 읽었다. 대문호의 작품이기도 하고, 또 3권이나 되는 작품을 선택했던지라 꽤나 걱정을 하며 읽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막상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질리지않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초반에 읽기 시작하면서 느꼈던 점은 톨스토이가 한사람 한사람의 모습이나 심리를 꽤나 디테일하게 그려낼 수 있는 작가라는 점이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작품 속으로 더 푹 빠져서 읽게 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제목이 안나 카레니나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하는 포인트가 꽤 여러번 등장하는데... 초반에는 오블론스키와 레빈의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점, 그리고 안나를 매력적인 여인으로 그리고는 있지만 점점 고구마 캐릭터로 변해간다는 점, 더 중요한 것은 안나의 이야기가 전체의 축이라기 보다 안나를 포함하는 꽤 넓은 범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의문스러웠던 점은 안나의 죽음에서 끝이 아니라 그 이후 레빈의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는 점. 물론 그렇지만 제목이 안나 카레니나여서 이상할 것도 없다. 단지 톨스토이는 주인공 안나를 통해서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싶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

그런데 이렇게 줄곧 떠오르던 많은 질문들이 마지막에 실려있던 작품해설을 읽으면서 많이 해소되었다. 결국 이 작품의 주인공은 안나와 레빈이었다는 것. 그리고 레빈이 톨스토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캐릭터라는 것. 이 부분을 읽고서는 꽤 많은 부분을 이야기할 수 있었다. 레빈으로 시작해서 레빈으로 끝나는 이 소설의 구성도 그렇고.. 또 레빈이 등장할 때마다 진지해지는 스토리가 그러했다. 특히 레빈이 관계된 이야기들 속에서는 많은 사회문제와 농업에 대한 문제, 종교에 대한 문제 등 꽤 많은 사회문화적인 이야기들을 꺼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하고싶었던 이야기들을 레빈을 통해 풀어내었던 것을 아니었을까... 또한 등장인물이기는 했지만 안나를 포함한 이 모든 스토리들을 대신 전해주는 화자의 역할까지 부여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가..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쨌든 함께읽기 덕분에 또 이렇게 묵혀두었던 작품을 끝낼 수 있었다. 왠지 톨스토이 작품에 대한 부담감과 편견이 많이 사라진듯 하여 좋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한 것 같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형과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눈치챈 사실은, 그들이 과학 문제들을 정신 문제와 연결하면서 몇 번이고 그 중요한 문제를 다룰 뻔하다가도 번번이, 그러니까 그가 보기에는 중요한 문제에 근접하는 즉시 서둘러 논의를 회피하고 다시금 세세한 분류와 제한 조건들, 인용, 암시, 권위자들을 들먹이는 길로 빠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오블론스키는 유쾌하게 웃었다. “그건 힘든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표시지. 그 사람은 머리를 쓰거든.”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내게는 야만이야. 지금 여기 있는 것들도 야만으로 느껴지고. 우리 시골 사람들은 일을 하기 위해 빨리 먹으려고 하지. 그런데 자네와 나는 어떻게 하면 오래 먹을 수 있나 궁리하고 있어. 그래서 굴을 먹는 거고······.” “그렇지.” 오블론스키가 말을 받았다. “그렇지만 바로 여기에 문명의 목적이 있는 거야. 모든 것으로부터 즐거움을 취하라.” “그게 목적이라면 난 차라리 야만인이 되겠네.”

“연애결혼요? 무슨 원시시대 사고방식을 얘기하시는 건가요! 요즘 누가 연애결혼을 얘기하나요?” 대사 부인이 말했다. “어쩌겠습니까? 그 어리석은 구습이 아직 근절되지 않은걸요.” 브론스키가 말했다.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정말 안됐어요. 이성에 따를 때만 행복한 결혼이 된다고 난 생각해요.”

“글쎄, 그 점에서는 자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스펜서와 적어도 의견 일치를 보이는군. 스펜서도 그러지. 교육은 삶의 복지와 편리함, 그리고 자주 하는 목욕의 산물이지 읽고 셈하는 것의 산물은 아니라고 말일세······.” “그게, 스펜서와 의견 일치를 보인다니 기쁘기도 하고, 아니 그 반대로 무척 기분이 나쁘군요. 그냥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실인데 말입니다. 학교는 못 돕습니다. 농민들을 도울 수 있는 건 그들이 더 부유해지고 여가도 많이 누리게 해줄 경제 구조입니다. 그때가 되면 학교도 생길 거고요.”

돈을 얻기 위해 들어간 노력이 그 돈으로 산 만족에 상응하는지를 따져보는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버렸다.

예상 외로 톨스토이는 만일 뭔가가 안나를 구할 수 있다면 그건 삶의 부조리와 희극성에 대한 그녀 자신의 감각, 그리고 농담을 애인과 공유하려는 소박한 바람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톨스토이는 삶의 비극성과 마찬가지로 희극성도 이해하고 있었고, 그의 위대한 소설들은 그 두 가지 요소로 충만하다. (존 베일리 _ 머리말 | 삶의 비극과 희극 모두를 수용한 드라마)

안나와 레빈, 더 크게는 안나 쪽 사람들과 레빈 쪽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치밀한 교차구성 원칙하에 전개되던 이야기는 7부 마지막에서 안나가 퇴장하자 8부에서 양쪽을 엮어내던 끈을 풀어버리고 현재 삶, 즉 톨스토이가 살던 당대의 가장 큰 이슈를 소설 안으로 끌어들인다. (윤새라 _ 작품해설 | 고전의 힘: 시공을 넘어, 사랑을 넘어)

레빈이 깨우친 통찰의 본질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고, 타인과의 간격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러한 본질적인 고독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삶 속에서 선을 실천하겠다는 결심이다. (윤새라 _ 작품해설 | 고전의 힘: 시공을 넘어, 사랑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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