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本]'s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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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Book Review

이국종 『골든아워 1, 2』

| Mashimaro | 2018. 11. 29. 21:47



     



이국종 교수가 누구인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언젠가 TV에서 얼굴을 처음 보게되었고, 중증외상학 혹은 중증외상센터라는 용어도 그를 통해 처음 들어봤다. 물론 그런 표현을 듣기는 했지만, 외과 안에서 세분화되는 형태인가보다..라는 생각, 그리고 응급실에서 살다시피 하는 분인가보다.. 하는 정도의 인식이었다. 이후에도 가끔씩 이국종교수는 TV 혹은 SNS에 등장했고, 그가 불같이 화를 내고 있는 장면을 보았을 때에는 정말 열정적인 의사인가보다..정도로 생각했던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에도 별 생각이 없었고, 지금에 와서 고백하지만 난 참 부끄럽게도 이 책이 리디셀렉트에서 제공하는 책이었기에 한번 읽어보자라는 마음으로 펼쳤던 것 같다. 펼치자마자 저자는 좋아하는 김훈작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을 하였고, 글재주에 대한 겸손한 고백을 하였지만, 읽어가는 내내 저자가 좋아하는 작가와 같이, 혹은 이과스럽지 않은(?) 굉장한 글빨로 이 책에 나를 몰입시켰다. (나 역시도 김훈작가를 좋아한다.) 사실 이 부분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저자가 평소에 참 많은 생각들과 고찰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고, 그것을 글로 표현해 내었을 때 공감 혹은 감동을 주는 부분들이 참 많았다. 또한 2권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길다면 꽤 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숨도 못쉬고 계속 읽게 만드는 생동감이 있었다. 솔직히 의학드라마 같은 여느 영상들 보다도 그의 글이 더 생동감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현장에서 겪은 이야기들을 엮었기 때문일 것이다. 


읽는 내내 정말 순수하게 함께 힘들었고, 함께 울먹거렸으며, 함께 분노했다. 그리고 단순하게 외과의사라고 생각했던 내가 참 부끄러워졌다. 어찌보면 이 책은 저자의 기나긴 넋두리를 담은 책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단순한 넋두리로 듣기에는 너무나도 괴롭고, 또 너무나도 무거운 생명들을 짊어지고 하는 넋두리였다. 나라면 이렇게 살아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사명감을 가지고 버틸 수 있을까... 저자는 그저 어쩔 수 없이 버텨내는 것 처럼 표현하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모두 다 버텨낼 수 있고 또 짊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지막에 정말 많은 페이지수를 할애해서 많은 이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소개한 점이다. 이 책에 등장했던 여러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나 역시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며 노력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뛰고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역시 '생명'을 다루는 일은 정치적인 색깔보다도, 각기 다른 사람들의 성격보다도, 모두가 처한 다른 환경들 보다도 우선하는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이 책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저자의 미션 혹은 비전이 아직도 성취되지 못한채 난항을 겪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기도 하지만, 그래서 저자의 용기가 더 대단하게 느껴진다. 사실 내용도 매우 적나라하게 서술하고 있는데, 아직도 한 병원에 소속되어 나름의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저자가 혹시나 '더' 불이익을 받게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될 정도이다. 지금은 마음밖에 보탤 수 있는 것이 없지만, 무언가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부터라도 조금씩 인식의 변화를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할 것 같다. 





열심히 공부해라. 의과대학 학생들이 교수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공부를 열심히, 성실히 해야 하는 이유는 의사로서 기본 지식을 함양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의사는 남의 몸을 가르는 면허를 부여받는 사람이다. 의과대학의 방대한 학업량과 공부에 대한 태도는 의사를 만들어가는 기초 자질 형성과도 연관된다. 엄청난 양의 공부를 열심히,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환자를 진료할 수 없다. 


사실 내과와 외과, 안과 밖의 가름은 무의미하다. 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내과라고 해도 무방하다. 수술적인 치료법의 표준 술식은 19세기 중반부터 도입되기 시작했다. 현재 행해지는 대표적인 수술법 중 많은 부분이 그 시기에 도입된 외과적 수술에 뿌리를 둔다. 당시에는 제대로 된 마취과 의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약물 치료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오늘날 수술 치료 결과가 비약적으로 개선된 데는 외과 의사들의 술기 향상 뿐 아니라 마취과학이나 수술 후 약물 치료 요법 발달에 기인한다. 외과 의사도 수술 전에는 정확한 내과적 진단을 해야 하고 수술이 끝난 후에는 내과적 집중치료에 정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중증외상 환자들을 감당해낼 수 있다. 


이렇게 환자의 파열 부위 깊숙이 들어갈 때, 외과 의사들은 환자의 전신 상태까지는 집중하지 못한다. 마취과 의사들만이 그 공백을 틀어막는다. 수술대 위의 환자는 마취과 의사들의 손끝에서 무의식에 잠기고, 외과 의사는 그 상태에서만 환자의 환부에 접근할 수 있다. 나는 늘 내 좌측에서 말없이 궂은일을 도맡는 마취과 의사들이 고마웠다. 거칠고 험한 수술적 술기들이 이루어지는 죽음의 전장에서 그들이 죽음의 기운을 막아주지 못한다면, 차갑게 변해 미끌거리는 피의 감촉만이 내 손끝에 전해질 것이다. 


응급실을 크게 열어놓은 수많은 대학병원들은 정작 환자가 수술 뒤 들어갈 중환자실이나 입원실이 없어 고생하면서도 중환자실 병상을 충분히 확보하지 않았다. 중환자실 병상 없이 응급실만 크게 만들어놓는 것은, 고속도로 정체를 해결한답시고 톨게이트만 크게 만들어놓은 것과 같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조직 내외의 많은 고위급 인사들은 아는 체하며 타이르듯 말한다. '조직은 몇몇 사람의 힘으로 끌려가서는 안 되며 누가 그 자리에 오더라도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의 힘으로 움직여야 한다.' 진리이나 이것만큼 누구나 다 아는 거짓말은 없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특히 특정한 오너(owner)가 없는 대부분의 공조직이나 학교와 같은 조직에서 업무를 추진하거나 정책 방향을 밀어붙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 추진력은 해당 업무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의 열정'에서부터 나온다. 모든 정책 추진에 있어 완성도는 담당자 개개인의 업무 능력에 좌우되고, 이에 대한 최종 책임은 정책 결정권자가 인사권을 행사하면서 완성된다. 모두가 알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는 이유는 그래야만 책임 소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너나 가라, 군대. 나는 냉소적인 그 글을 다시 생각했다. '군'이라는 조직에서 처음 겪는 정신적・육체적 괴로움이 클 것이고, 잊을 만하면 군에서 벌어지는 사고 소식이 들려오는 현실이 떠올랐다. 나라는 가장 좋은 시절의 청년들을 징병해가면서도 복무 중 벌어지는 다양한 사고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는 듯 보였다. 결국 군 복무 중에 다치고 죽는 것의 억울함은 오롯이 피해자의 몫으로 남았다. 


로열런던병원 옥상의 헬리콥터 착륙장에서 보던 모습들이 일본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그 같은 변화의 주축이었던 마시코 교수는 나보다 먼저 로열런던병원에서 영국의 외상 의료 시스템을 배웠다. 그는 '처음에 시스템을 배우려면 나사못 하나까지 그대로 복사해와야 한다. 그래야만 원래 취지가 왜곡되는 현상을 막을 수 있다. 자국의 특성을 감안한다는 명분으로 방향을 달리해 도입하면 완전히 뒤틀려 엉뚱하게 바뀔 수 있다. 따라하려면 완벽한 모방이 선행되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수많은 논의와 회의에서 말잔치를 벌일 자들은 많았다. 하지만 실제 사고 현장으로 출동해 환자를 헬리콥터에 실어 올려 응급 처치하고, 병원으로 데려와 수술해 환자를 살리는 이들은 그 같은 회의 자리에 없었다. 회의석상에서 쏟아지는 말의 주인들은 중증외상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했고, 사고 현장을 머리로 아는 이들은 실제 현장에서 일하다 온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환자들을 구조하여 병원으로 날아오는 소방대원들과 의료진은, 언제나 환자들과 함께 사선을 넘나든다. 소방항공대의 한 기장이 내뱉었던, '표창이고 뭐고 죽고 나면 다 소용없어요'라는 말과 편지 속의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고자 자신들의 고귀한 생명을 바친'이라는 글귀가 머릿속에서 얽혀 들어갔다. 


한국 중증외상센터의 직원 고용 수준은 영미권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적은 인력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하느라 과로로 쓰러져나갔다. 수술방의 모든 의료진이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의 피를 뒤집어썼다. 전담간호사들이 다치거나 유산해 대열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이 현실은 무관심 속에 외면받고 있었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무슨 이유로 희생을 기본 값으로 감수해야만 하는가. 거대 담론만이 존재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중증외상센터의 지속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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