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제목을 본 순간 나를 확 잡아당겼던 책이다. 내가 가장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또 어떻게 공부해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갈증이 늘 있어왔기 때문이다. 공부를 좋아하는 기질은 아니지만, 연구직에 있는 상황이기도 한 터라, 특히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신앙과 공부(연구)를 병행해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나에게 늘 따라다니는 과제가 되었다. 그래서 《공부하는 인간》이라든지, 《공부는 예배다》 등등 여러 책을 읽어보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매우 긍정적인 자극을 받기도 하였으나, 역시나 남아있는 갈증들이 있다. 그래서 또 버릇처럼 집어든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책을 고른 이유로 제목도 한몫 했지만, 작가도 하나의 기준이었다. 이원석작가는 일전에 《서평 쓰는 법》이라는 책을 통해서 만났고, 같은 작가가 쓴 《공부하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고는 집어들게 되었다.
일전에 읽었던 공부에 대한 많은 책들과는 달리, 이 책은 완전히 신앙서적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부는 예배다》 역시 신앙서적의 범주일 수 있지만, 이 책은 여느 책들보다 신앙인들을 타켓으로 하는 색깔이 강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뭐랄까, 가장 중요한 공부에 대한 당위성 혹은 소명의식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더 적합한 책이라고 생각했고, 읽으면서 많은 도전이 되기도 했다.
사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 그리고 의식하고 있는 내용들도 들어있지만, 많이 배우게 되는 부분들도 많았다. 그리고 확실히 나의 현황과 부족한 부분들, 알면서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는 부분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수확은 여러가지 참고할 수 있는 더 많은 좋은 책 혹은 자료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다시 한번 곱씹어서 찬찬히 읽어봐야할 것 같다.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지성과 영성의 사이에서 하나님 가까이 더욱 나가는 거룩한 모색과 도전을 멈추면 안된다. 공부하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으면, 거룩한 문화를 형성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가 없다. 영성에의 노력만큼이나 지성을 갖추고, 영성이 지성에 잠식당하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지경으로 점점 나아가야 한다.
이는 올바른 공부를 통해서 습득한 지식을 온전히 체화했기 때문입니다. 서둘러 말하자면, 이는 우리의 경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성에 대해 아무리 많이 알고 떠들어 대더라도 우리의 체험으로 증명이 되지 않는다면, 공허한 것입니다.
인위적인 윤리적 실천보다 자연스러운 인간적 삶을 보여 주는 사람이 더 아름답습니다. 공부의 온전한 성취는 지식을 인위적으로 실천하다기보다 자연적으로 살아내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바른 성품에서 배어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행위를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행위는 한 개인과 분리된 자비나 정의의 고립된 행동이 아니라, 성품의 표시"인 것입니다.
공부는 학(學)을 습(習)하는 것입니다. 학습이란 곧 지식이나 생활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삶 속에서 익힌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필요한 상황에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체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운 것이 머리에서 몸으로 내려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자신의 복과 영생을 위한 것일 뿐이라면 곤란합니다. 성경을 읽는 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대해 지식이 늘어나는 만큼 세상에 대한 연민과 긍휼이 늘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부터 가족과 이웃과 마을과 나라와 세상을 향해 확장되어야 합니다.
배움(學)이 없는 익힘(習)이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 배움의 대상으로서 성경과 기독교 고전을 넘어서 세상의 고전 또한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됐건, 고전이 됐건, 우선은 열심히 읽고 배워야 합니다. 그 내용과 형식에 대해 철저하게 익숙해져야 합니다.
그분[예수]은 지성 생활의 모든 분야에 살아 계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 들어설 때 막연해 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선한 일에 힘쓰면 된다. 선한 시를 쓰고, 선한 노래를 작곡하며, 선한 사진을 찍고, 선한 영화를 만들고, 선한 풍경을 그리고, 선한 연구를 실시하고, 선한 건물을 지으면 된다. 굳이 기독교적인 노래를 만들거나 기독교적인 시를 쓰거나 기독교적인 연구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선한 일을 하면 그것이 최선의 기독교적인 일이다.
근대의 독서(讀書)는 기본적으로 저자의 독백과 독자의 경청으로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이 대화는 고독하고 일방적인 방식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공부(工夫)를 위해서 필요한 독서는 도반들과 함께하는 우정의 대화를 위한 텍스트에 대한 것입니다. 원래 고전 텍스트는 대화의 기록입니다. 텍스트라는 어휘는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는 직물(texture)에서 연원합니다. 이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텍스트는 통시적이고 공시적인 만남이 교차하는 산물입니다. 결국 대화의 산물이라는 뜻에 다름이 아닙니다. 대화의 산물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이에 대한 치열한 대화일 것입니다.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자 담대하게 말한다는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마음 깊은데에서부터 소박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굳이 세련된 논변이나 어려운 개념을 동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진정성이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이게 마냥 쉬운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나의 진정성이 중요한 만큼 남의 진정성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마음이 중요하다면, 상대의 마음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내 진심이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상대의 진심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이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기에 서로를 배려해야 하는 책임이 따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담긴 진정성에 기초해 서로가 각자의 주관적인 진실로 교류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대화에서 기적이 발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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